동경사전 외 1편

  

동경사전

  

  아주 캄캄한 밤이었는데
  그림 한 점을 선물 받았다

  화방에서 유화물감을 만지고 오는 길이었다

  무얼 그릴 거냐고 묻는 이가 있었다
  높은 곳에서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을 보고 싶어, 그 밑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 싶어, 사람을 그리고 싶어, 흰 종이를 가득 쌓고 싶어, 공기를 찾고 싶어, 작은 칼을 갖고 싶어

  그런 말을 못 하고 집으로 갈 때가 있다

  그날 밤 침대 옆에 그림을 두고 잤어
  조용한 바람이 부는 방
  나는 너의 독자적인 화풍 되었을까

  분홍색 구름이 뜨네

  구청 앞의 조형물은 싫증이 나고 1층에 걸린 큰 그림엔 먼지가 가득한데, 그것마저 미술이구나

  서점에 가서는 당신의 책이 몇 쇄를 찍었나 맨 뒷장을 펼쳐보았고, 한 백 명쯤은 당신의 영화를 봤을지 검색해 보면서, 나는 할 일도 안 하고 서점이나 영화관만 들락거린다

  당신의 집이 보이는 창문을 갖고 싶은데
  우리 집 벽에는 못을 박을 수 없대
  구멍 없는 네 개의 벽면을 가진 나는
  우아함도 불우함도 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을 바닥에 진열했다

  도자기나 상패, 네가 그려준 밤하늘
  그 옆자리에 나를 놓아두기도 하면서

  그런 자세로 쓰는 편지가 있단다

  구름 속으로 얼굴을 반쯤 담갔을 때
  너무 아름다웠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다

  여기 지옥이구나

  

  

가상의 비

  

  가상의 비가 내린다.
  내가 있는 사이버.

  ─

  저 푸르고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싶다.
  비가 오는 장면
  아무것도 젖지 않는구나.

  ─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나는 한가운데 같았다 한가운데의 식물과 한가운데의 깃발과 한가운데의 점 한가운데의 쟁취 한가운데의 뿔 한가운데의 화살과 한가운데의 잔해

  ─

  여러 번 반복되는

  길을 잃는 꿈
  버려지는 꿈
  잠을 잤구나 내가.

  ─

  뒤적이고 있다.

  핸드폰에서
  컴퓨터에서
  회색 도서관에서

  즐겨찾기로 별을 늘리며

  미래를 찾고 있다.
  심해의 깊
  이별의 가능성 속에 하나의 빛 번짐
  일어난다.

  굴절의 힘으로 쓰는 사랑시가 있다.

  그런 형태로 지어진 천국이 있다면 믿을 거니,
  주로 바닥에서 시작된

  근데 나는 지금 길을 잃는 중이다.

  눈앞에 흐르는 비를 맞는다.
  파도에 젖어 있는 기분이다.

  나의 가상은 이런 식이고

  너는 내가 찾아 헤매는 오래된 가설이다.

  우리를 빗나가는 예외를 주워 담으며

  닦고 지우고 세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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