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 없이 타오르는 울타리 외 1편

  

냄새 없이 타오르는 울타리

  

  폭염주의보에는
  비비추가 있고
  에키네시아와 수크령이
  녹음도 갈아입지 않고 서 있다

  버드나무는 그늘로 바쁘고
  사람은 그늘을 찾느라 바쁜데

  저 꽃들
  꽃잎들
  종일 타는 빛 아래서

  손을 대면 차고 싱싱한 밤이 가득하구나
  저 알 수 없는 평정심

  그러면 나는 나무 밑으로 뒤뚱뒤뚱 걸어가는 오리에게
  너도 그런지 묻는다

  오리가 왜 뒤뚱뒤뚱 걷는지 아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무릎이 없어서냐고 되물으며
  나는 내가 싫어졌다
  나를 경멸하게 하는 건
  하나같이 내가 한 말

  오리 무릎을 검색하다가
  사람의 무릎 위에서 잠드는 오리 영상을 봤다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다

  풀물 든 가방 위에
  허접하게 끄적거리던 노트를 내려놓고
  개미 떼가 지렁이 하나 끌고 가는 것을 본다

  무례하다, 생각이 있어서
  능소화 가득 번지는 불길

  나는 나를 건드리지 않고
  혼자서도 잘 보고, 걷고, 자고, 꿈을 꾼다
  
  

평화가 탱크처럼

  

  안 가본 곳이 많다
  서진이 네 살 땐가 창포원에는 와봤는데
  조마조마 아이 걸음만 쫓았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우리
  평화였을까

  시 쓰는 친구와 함께
  천구백칠십년대의 대전차 방호시설 앞에 선다
  시민아파트1는 무너지고
  시민이 막아내야 하는 것들은 여전하지

  포를 겨누던 곳으로 풍경을 본다
  여름 잎사귀들 여름 발자국들 끝없이 열려 있는 여름의 내부들
  그 투명한 적진의 풍경

  어제 싸운 친구에게 빌린 참고서처럼
  베를린 장벽이 세 개씩이나 서 있으니
  여기를 독일이라고 불러볼까
  독일과 도봉구가 전쟁과 평화처럼 가깝다
  그냥, 커피 한잔하는 곳이라고 불러도 될까

  이곳에서 활동한다는 예술가
  언제 한번 꼭 들르겠다 했는데
  오늘 있으려나
  ‘쓰레기 영웅’이라 적힌 문을 두드린다

  관리자가 청소차를 끌다 말고
  “쓰레기 영웅 오늘 쉬어요.”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들으면 다르게 들린다
  영웅에게 휴일이 있다는 게
  아주 악한 세계는 아니라는 말 같아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을 잘 구분하면 좋겠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지

  콸콸 쏟아지는 것은 비가 아닌 빛

  평화가 탱크처럼 멈춰 선다
  
  
  

주석

  1. 대전차방호시설 2~4층에 있던 위장용 시민아파트로 2004년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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