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최저가 상품을 찾았고, 풍선투어의 ‘[100%출발확정]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12일’ 예약서를 작성했다. 상품 가격은 179만 원이었다. 12일 동안 세 나라를 여행하는 상품은 풍선투어뿐이었다. 사이트에는 ‘마감임박’, ‘초특가패키지’라는 단어가 노란색 별표를 달고 윙크하듯 깜빡거렸다.
다음 날 여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해당 상품은 1유로당 1,288.26원을 바탕으로 가격이 책정됐고, 출발 15일 전 환율이 1,314원 이상이면 추가 금액이 발생할 수 있는데 출발일이 2주밖에 남지 않은 현재 유로 환율이 1,333원이라서 10만 원을 더 내야 한다고 했다.
예약하시겠습니까? 직원이 물었고, 나는 노름판에서 원금을 잃은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며 하겠다고 대답했다. 비용에는 호텔과 차량, 식사가 포함됐고, 가이드와 기사 경비 120유로는 현지 지불이었다. ‘선택관광’ 일곱 개는 포기하기로 했다.
고개를 한껏 젖혔던 탓일까. 열세 시간 만에 도착한 바르셀로나의 하늘은 끝없이 높고 맑았다. 스페인은 한국보다 여덟 시간 느렸고, 아직 여명의 엷붉은 빛이 남아 있었다. 기내에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지만 깊이 잠들지 못한 탓에 몽롱하고 어지러웠다.
앞 유리에 여행사의 이름을 붙인 차가 대기 중이었다. 42인승 리무진에 25명이 탔으므로 좌석은 넉넉했다. 나는 내 옆 빈자리에 가방을 올려두었다.
오전 일정은 검은 성모상으로 유명한 몬세라트,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성가족성당, 20세기 초 엘리트들이 꿈꾼 미래 주택단지를 볼 수 있는 구엘공원이었다.
인솔자는 전체 일정과 선택관광 정보를 전달하면서 기사 및 가이드 팁과 함께 옵션 비용을 걷겠다고 했다.
선택관광은 그 도시의 핵심 포인트를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전부 하시는 게 좋아요. 다 하신 분들은 만족도가 매우 높습니다. 의무는 아니지만 여행자의 권리예요.
한두 번 단체를 이끌어본 게 아닌 듯 똑 부러지는 말투였다. 옷을 여러 개 겹쳐 입은 스타일이며 히프 색과 크로스백을 더블로 걸쳐 멘 것에서 실용성과 전문성이 느껴졌다.
인솔자는 맨 뒷좌석부터 앞쪽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반대쪽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쳐 중심을 잡은 뒤 큰 동작으로 돈을 세고 거스름돈을 돌려주었다.
그녀가 내 옆에 섰을 때 나는 준비한 120유로를 건넸다.
네?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인솔자가 반문하듯 물음표를 세웠다.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경멸이 스친 것도 같았다. 팁만 건넸다는 걸 단박에 알아챈 거겠지.
몬세라트 산악열차랑 리스본 뚝뚝이는 필수로 하셔야 해요. 이동 수단을 옵션으로 넣어둔 것이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빠지면 전체가 움직이지 못하게 돼요. 이건 저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출발하기 전에 여행 후기를 찾아봤다. 옵션을 선택하지 않아도 여행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글을 읽고 용기를 냈다. 나도 떠날 수 있겠구나. 배짱 있게 덤비면 가난한 나도 유럽을 볼 수 있겠구나. 가난뱅이는 휴일에도 일해야지, 여행은 무슨 여행? 내가 나를 억압했다. 외출하면 돈이 들었으므로 쉬는 날에도 집에만 있었다. 휴가와 여가, 워라밸은 남의 얘기였다.
인솔자는 개인이 아닌 단체에 힘을 주고 있었다. 너의 선택, 혹은 포기가 무리에 불편을 줄 수 있어.
허리춤에 묶어뒀던 복대를 꺼냈다. 20유로를 돌려받은 뒤 100유로를 내밀었다. 환전해온 400유로에서 벌써 200유로를 써버렸다.
샐러드와 닭요리, 후식으로 오렌지가 제공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중국식당에 갔다. 단체 손님을 맞이하는 식당은 포드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공장을 연상케 했다. 일렬로 놓인 테이블에는 똑같은 음식 수십 개가 반듯하게 차려져 있었다. 백여 명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다. 직원들은 자신이 담당한 구역에 물병을 갖다주고 접시를 나르는 등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행은 인솔자가 정해준 테이블에 앉았다. 모두 식사를 마치기까지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30분쯤 이동했고, 호텔에는 7시쯤 도착했다. 조금 전 상점이 달린 주유소를 하나 지났을 뿐 호텔 주변에는 작은 네온사인 하나 없었다. 물 필요하신 분은 기사님께 1유로 내고 구입하면 됩니다. 앞서 내린 인솔자가 손님들을 향해 소리쳤다. 500밀리 생수 한 병에 1,300원이라니.
떠난다는 건 이상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자꾸 냉장고를 열어봤다. 멸치볶음, 달걀, 우유는 가기 전에 다 먹어야지. 김치, 젓갈, 맥주는 오래 둬도 괜찮을 거야. 또 뭐가 있지? 찬장을 하나하나 개폐했다. 식용유와 조미료, 라면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날짜가 임박한 것들을 끄집어냈다. 박스째 다용도실에 던져두고 잊은 게 없는지 살폈다. 열이틀 나가 있는 것뿐인데 오래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굴었다.
떠난다는 건 버리고 싶다는 걸까. 가져갈 짐을 챙기다가 나는 티셔츠도 버리고 양말도 버리고 신발도 버렸다. 칫솔과 수건도 버렸다. 10년 전에 산 파자마와 솔기가 왕창 빠진 머리빗, 밑창이 닳은 슬리퍼도 버리고 싶었다. 버려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나.
그해 나는 몇 사람을 잃었다. 술 취한 밤마다 전화를 걸어왔던 동아리 동기에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가 사과도 받지 못하고 소식이 끊겼다. 1인 가구의 경제와 생활 관련 원고를 윤문하는 대가로 돈을 받고, 소개해준 선배에게 저녁을 사는 자리에서 너는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냐 존나,라는 말을 듣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인턴십 동기였던 L은 내가 청년들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강남역 묻지 마 살인과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고를 언급하며 목메어 우는 L을 나는 참담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더없이 안타깝지만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쉽게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씨발, 넌 측은지심도 없냐? L이 소리쳤다. 불쌍하지, 불쌍해. 그런데…….
우리 그동안 썸 탄 거 아니었어요? 진지하게 만나볼래요? 잘해줄게요. 고백은 한 번뿐이었고, 내가 대꾸 없이 K의 눈빛이며 입술을 바라보고 있자 K는 내 얼굴을 천천히 훑고는 악수도 없이 가버렸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자격증 공부를 했다. 고용노동부에서 제공하는 국민내일배움카드를 발급받으면 훈련비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교육기관에서 출석과 평가 등으로 훈련생을 철저히 관리하는 탓에 매섭게 나를 몰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운전면허 외에 사회복지사 2급과 GTQ 포토샵 1급 자격증을 취득해 이력서에 추가했다. 다이어리에 10분 단위로 해야 할 일을 적고 지우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텔레비전을 켜놓고 핸드폰으로 SNS를 뒤적이거나 샤워할 때는 듣기 모드로 이북을 틀어놓았다. 멍때리기가 곧 쉼이라는 인식은 내 안에 없었다.
나는 나를 쥐어짜고 옥죄는 사람이었고, 서른 살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도착〉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한참을 흐느꼈다. 심장을 쥐어짜는 손풍금 소리. 나에게 ‘여가’ 같은 걸 주고 싶었다. 이따금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고, 죽기 전에 내게 주는 선물이라 여기면 된다고 합리화했다. 비행기를 타는 것, 이륙하는 것, 하늘을 나는 물체 안에 잠시 머무는 것, 어쩌면 나와 비슷한 내 주변 사람들은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움직임이었다.
갔다 올게.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미를 주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다. 산악열차와 귀족마차는 탔는지, 빠에야와 하몽, 쿠스쿠스는 먹었는지, 현지에서 먹는 맛은 어떤지 누구도 물어보지 않을 테니까.
현지 가이드가 합류했다. 앞으로 전 일정에 함께한다고 했다. 옐로브라운으로 염색한 단발머리 여자는 일행들에게 복주머니처럼 포장된 초콜릿을 나눠줬다. 10여 년 전 스페인에 공부하러 왔다가 남편을 만났고, 지금은 결혼이민자로 살고 있다고 했다.
카타리나, 그녀의 세례명이었다.
선생님들은 참 운이 좋으시네요. 지난해 1월 1일에는 꼬마기차 운행을 안 했거든요. 올해는 한답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못 가지만 산 미구엘 시장, 레알 마드리드 축구장, 마요르 광장에 갈 거예요. 산 미구엘 시장 아시죠? 〈꽃보다 할배〉에서 백일섭 할아버지가 버섯 요리를 굉장히 맛있게 드셨잖아요. 바로 그곳엘 선생님들이 가보시는 겁니다.
축구 팬이 아니어도 레알 마드리드 축구장은 꼭 보셔야 해요. 기념사진도 반드시 찍으세요. 이 축구장에 한번 와보는 게 평생소원인 사람들에게 자랑이 될 거예요. 사실 우리 상품에 마드리드 일정이 하루밖에 없어서 프라도 미술관에 입장하는 팀은 그거 딱 하나 보고 가거든요. 시내 구경은 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들은 축복받으신 거예요. 이전 팀들은 경험하지 못했던 마드리드를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선생님들, 행운을 즐기십시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프라도 미술관 관람을 기대했지만 서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국인은 특히 가성비를 따지잖아요. 여행사에 낸 돈 이상으로 뽑을 수 있는 건 다 하세요. 고생만 죽도록 했다고 게시판에 적는 분이 계신데 여행의 묘미를 알려면 그 순간, 그 장소, 그 시간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 해요. 해볼 거 다 해보고, 먹을 거 다 먹어보고요.
한국만큼 여행상품이 저렴한 나라는 없어요. 외국인들한테 가격 말하죠? 다들 깜짝 놀라요. 백만 원대로 유럽을 여행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소비자가 사면 살수록 여행사는 손해예요. 대량 구매한 항공권을 소진하면 그나마 다행이죠. 여행객들에게는 최고의 호기일 수밖에요.
선택관광은 필수인 거 아시죠? 일단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놓되 알찬 체험들은 선택관광으로 빼둔 거라고 보시면 돼요. 벤틀리 같은 최고급 차를 뽑아서 에어컨조차 안 달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쾌적하고 편안한 여행이 되려면 선택관광을 하셔야 해요.
카타리나는 운전사와 대각선 방향 첫째 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릎으로 상체를 지탱하고 손님들을 향해 뒤돌아섰다. 한 손님이 불편하게 그러지 말고 앉아서 말씀하시라고 했지만 카타리나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나는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깊숙이 눌러앉았다.
플라멩코는 블로그 후기 같은 걸 보고 안 한다는 분이 많은데 직접 보신 분들은 후회 없으세요. 노래와 춤, 음악적 기교가 한데 어우러진 스페인 예술의 꽃, 플라멩코는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까. 종교, 축제, 개인 행사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플라멩코가 등장했어요. 춤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집시들의 생명력을 대변하죠. 한국에서 오리지널이라고 홍보하면서 플라멩코 공연을 올리는데 대단한 무용수가 와서 해도 오리지널은 아니에요. 맞잖아요, 선생님들. 저도 한국에서 본 적 있지만 새 발의 피예요. 무대도 진짜가 아니고요.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 지방, 특히 세비야에서 보셔야 제대로 보시는 겁니다. 진짜배기의 꿈틀거림을 느껴볼 가치가 있어요. 이번 여행에서 이 한 시간 반이 가장 특별할 거예요. 강추합니다. 카타리나, 정말 고맙네, 자네 설득에 넘어가길 잘했어, 이런 인사도 많이 받았어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선생님들.
선택관광은 하지 않기로 했지만 플라멩코는 삶 그 자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마음 깃발이 펄럭였다. 춤이 곧 삶인 생활. 춤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돈이 좋았지만 돈을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돈을 앞세우면 탐욕적이고 속물로 보이니까.
얼마짜리 회사에서 일해요? 얼마짜리 집에 살아요? 얼마짜리 노후를 마련해뒀어요?
당신의 부모는 얼마짜리였어요? 당신의 외모는 얼마짜리죠? 당신의 사랑은 얼마…… 미래는…… 내 머릿속은 숫자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신선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싼 걸 고르고, 상품의 색깔이나 질감이 아닌 가격표를 빠르게 일별했다. 질병보다 진료비를 먼저 생각하고, 적십자회비 고지서를 받자마자 구겨버렸다. 생명을 지키는 적십자 활동에 후원해주세요. Saving Lives, 함께 ‘쌔라’해요. 인정에 호소하는 문구를 ‘쌔하게’ 무시했다. 내가 제일 힘들거든, 씨발.
공연 관람은 90유로, 한화로 12만 원이었다. 너무 비싸다고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렇게나 독보적이라면…… 혹시…….
검색창에 ‘스페인 플라멩코’를 쳤다.
동네 뒷골목에 있는 선술집 같은 데를 극장이라고 부르는 것까진 괜찮아요. 교회 의자처럼 딱딱한 데 나란히 앉아 있는 것도 불편했고, 무대랍시고 우리 앞에서 치마를 펄럭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늙은 여자도 매혹적이지 않았어요. 캐스터네츠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기만 했고요. 글쎄요, 제 안목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겠죠.
글쓴이는 작년 가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했다. 언제 또 여길 오겠어? 하는 마음 반, 친구의 꼬임 반으로 플라멩코를 봤다. 결과는 대실망.
그러곤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아무튼 전 플라멩코 재미없다고 얘기했습니다아???
카타리나의 홍보는 계속됐다.
세비야 귀족마차 같은 경우 광장이 굉장히 넓기 때문에 선택관광을 해야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요. 안 하게 되면 한참을 돌아 걸어야 해요. 무척 지치실 거예요.
여행 2일 차였고 세비야는 6일 후, 모로코를 거쳐 포르투갈에 가기 전에 들르게 돼 있었다.
버스에 타면 어김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행지 소개와 정보 제공부터 쇼핑 안내, 구매 물품 추천, 최근에 본 유튜브 영상에 대한 사적인 감회까지 들어야 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김도련 박사님 강연을 봤는데 그분 말씀이 인상적이더라고요. 인간의 뇌는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을 구별하지 못한대요. 웃기 위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즐거워진다는 거예요. 유머러스한 말이나 과장된 행동에 의존하는 건 조건적인 웃음이고, 그건 진정한 웃음이라고 할 수 없대요. 웃음의 원천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야 한답니다.
김 박사님이 말하길, 어린아이는 하루에 백 번 이상 웃는대요. 하지만 어른들은 열 번도 웃지 않는대요. 혼자 있으면 웃을 일이 별로 없잖아요. 이렇게 같이 있을 때,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새로움을 만끽할 때, 짝꿍 쳐다보면서 많이 웃으세요. 웃음은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혈압을 떨어뜨리고 혈액순환을 개선시킨대요. 소화기관을 안정시켜주기도 하고요. 선생님들, 마음껏 웃으세요.
톨레도에서 나는 꼬마기차를 타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걸 안 한다고요? 한 시간 동안 혼자 계셔야 하는데요? 가이드의 날 선 염려를 웃음으로 넘겼다.
걷기로 했다. 꼬마기차에서 감상하는 풍경만 풍경일까. 걸으면서 보는 경치도 정적이고 겸손한 매력이 있겠지.
4만 원을 절약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너무 멀리 가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어 일행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바람이 찼다. 어깨를 오그렸지만 몸피를 작게 한다고 해서 온기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런 날씨에 쓰려고 가져온 핫팩은 캐리어 안에 있었다.
긴 성벽을 지나고 높은 아치형 성문을 통과했지만 그게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톨레도의 가치와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정보를 들려줄 가이드는 너무 멀리 있었고 전원을 켜지 않은 수신기는 자꾸 쓸모없는 사물이 되었다.
겨울에도 유럽인들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차나 맥주를 마셨다. 머리 위 간이지붕에 전기스토브가 달려 있었다. 그들을 위해 주인장은 전기를 아끼지 않았다. 4만 원을 절약했으니 차 한 잔 못 마실 것도 없지. 시계를 보니 만남까지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고작 20분을 있겠다고 카페에서 몇천 원을 쓰기는 싫었다.
점심은 한식이었다.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이 메인이고 나물과 감자 같은 밑반찬이 나왔다. 물은 테이블마다 한 병씩 드릴 거예요. 공깃밥 추가하실 수 있고 숫자 1 동그라미, 1유로 내시면 됩니다. 카타리나는 집게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었다가 엄지와 맞닿게 해 원을 만들었다. 인솔자와 가이드는 늘 일행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식사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선택관광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우리가 선택관광을 해줘야 인솔자와 가이드가 먹고살잖아요.
고등학생 아들과 함께 온 엄마가 속삭였다.
여행사에서 월급 받는 거 아니었어요?
흑발이 유독 눈에 띄었던 중년 여자였다.
아니래요. 회사에서 받는 건 거의 없고 옵션 비용에서 남기는 거래요.
첫날 팁을 따로 줬는데도요?
인솔자는 다르죠. 한국에서부터 같이 왔잖아요. 우리가 낸 팁은 가이드하고 기사한테만 해당하는데 그것도 기본수당이나 마찬가지여서 손님들이 얼마나 옵션에 참여하느냐에 따라 수입이 달라진대요.
말하는 건 주로 엄마들이었다. 고등학생 아들은 담화에 끼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인솔자랑 가이드는 양호한 거예요. 나 이탈리아 갔을 때 가이드는 대놓고 눈치 주더라고요. 선택관광 신청자가 조금 적다 싶으면 꽥꽥대고, 관광지 설명도 제대로 안 해주고. 식당에서 자리만 안내하고 휙 사라져서 물 달라는 말도 못했다니까요.
대화의 물꼬를 열었던 여자가 감자조림이 담긴 접시를 아들 쪽으로 밀었다. 아들이 엄마의 귀에 뭔가 속삭이자 여자가 직원에게 공깃밥을 추가했다. 여자는 동전 하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어쨌든 전 옵션 다 신청했어요. 그래야 재미있다니까 믿어봐야죠.
나도요.
저도 그래요.
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나의 소극적이고 변변하지 않은 여행이 누군가의 생활에 불안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쾌감이 몰려왔다.
단체 손님이 들어왔다. 점심 식사를 하러 온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나는 자리를 안내해주고 있는 남자를 알아봤다. 어제 갔던 식당에서도, 그제 갔던 식당에서도 그는 청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물은 테이블마다 한 병씩 드릴 거예요. 공깃밥 추가하실 수 있고 숫자 1 동그라미, 1유로 내시면 됩니다. 카타리나의 멘트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카타리나가 기름집이라고 표현한 상점은 오일숍이었다. 프런트 직원들은 잇몸이 드러나는 미소로 일행을 맞이했다.
1층에서 지하로, 좀 더 안쪽으로 앞장서 들어간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어둠에 물든 숲의 색을 직물로 옮겨온 듯한 진초록 슈트를 입은 남자는 먹기 좋게 잘린 미니 샌드위치와 검보랏빛 액체가 담긴 술잔 앞에 섰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남자가 스페인어로 제품을 소개하면 카타리나가 한국어로 통역했다. 두세 문장씩 끊어 말하는 리듬과 속도, 제품을 들었다 내려놓는 모양, 반원형으로 모여 있는 손님들에게 시선을 맞추는 것까지 남자의 태도에는 품위가 넘쳤다.
수없이 들어서 외울 정도가 됐을 텐데도 카타리나는 손님들의 눈높이에서 남자의 언어를 우리말로 옮겼다. 제품의 퀄리티와 할인가를 강조하는 대목에서 카타리나가 과장되게 반색했고, 나는 그녀의 상투적인 연기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남자는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을 소개하고 미니 샌드위치 위에 소스를 듬뿍 뿌렸다. 일행은 샌드위치를 씹고 유서 깊은 고장에서 오래 숙성한 포도로 만들었다는 발사믹을 목으로 넘겼다.
이동하면서 올리브나무 많이 보셨죠? 스페인은 전 세계에서 올리브를 가장 많이 재배하는 나라예요. 흔히 샐러드에만 올리브 오일을 뿌려 먹는다고 생각하는데 튀김용, 볶음용이 따로 있어요. 이건 엑스트라버진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발사믹은 구운 고기에 찍어 먹거나 잼 대신 빵에 발라 드셔도 돼요. 음주 다음 날 해장에도 좋고, 토닉워터에 타서 음료 대신 마시면 피로회복 효과도 매우 뛰어나답니다.
아르간 오일의 장점은 버스 안에서 질리게 들었다. 에스티 로더 같은 고급 화장품에 한두 방울밖에 들어가지 않는 아르간 오일이 50밀리 한 병에 겨우 6만 얼마,라는 것이었다.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이 올리브 오일과 비누, 아르간 오일로 만든 립밤과 핸드크림을 쇼핑 바구니에 담았다. 예뻐지고 건강해지려면 필요한 데다 찬스는 다시 오지 않고, 한국보다 싸다는 말을 거듭거듭 들은 탓이었다.
버스 안에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고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식은땀이 났다. 5만 5천 원짜리 발사믹 때문이었다.
내 처지에 가당키나 한가.
가톨릭과 이슬람의 문화가 혼합된 메스키타 사원을 돌 때도, 유대인 거리를 걸을 때도 머릿속에는 발사믹 생각뿐이었다. 근심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가이드의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자잘한 분노가 북받쳐 올랐다. 그라나다의 상징이자 이슬람 문화의 최고 걸작이라는 알람브라 궁전의 정원을 산책할 때는 붉은 궁의 아름다움이고 뭐고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꼴찌로 처졌다.
특성화고에 지원한 건 돈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한다고 했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깔본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는 관리자가 아닌 캐셔 중에도 대학 나온 사람이 있고, 그들은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어떤 ‘특별대우’를 받느냐고, 혹시 ‘가방끈이 짧은’ 엄마의 자격지심은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대학을 나오면, 돈이 있으면, 집을 소유하면, 차가 있으면 멸시받지 않을 것 같지만 좋은 대학, 많은 돈, 큰 집, 비싼 차의 목록은 끝도 없이 길고 그게 계급과 차별을 만들어낸다는 걸 나는 알았다.
동생도 금방 고등학생이 될 테니 내가 먼저 사회에 나가 자리 잡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때의 선택으로 나를 원망한 적은 없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나를 말렸다. 나를 말린 친구들은 다 인문계고에 갔다. 진학 후 그들과 멀어진 건 아니지만 만나도 할 이야기가 금방 바닥나는 느낌이었다. 반면 고등학교 동창들과는 무척 친하게 지냈다. 입학할 때 남자가 22명, 여자가 7명이었는데 그대로 3학년까지 한 반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생일뿐 아니라 생리주기도 기억할 정도로 서로를 잘 알았다.
친구들보다 한참 이른 고3 여름방학 때 취직했는데 사회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힘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내 또래 직원은 없었고 나보다 다섯 살 많은, 1년 전 대학을 졸업한 언니가 내 사수였다. 언니는 사람들 앞에서는 다정했지만 나와 둘이 있을 때는 화만 냈다. 내가 답답하다고,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일 처리가 느리다고 했다. 점심을 늦게 먹는 것까지 못마땅해했다. 나는 밥 먹는 속도가 느린 편이었지만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도 이해해주었다.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기다렸다. 먼저 일어나겠다고 천천히 먹고 오라고 말하고 자리를 뜨면 될 텐데 사수 언니는 그러지 않았다. 짜증 난다는 얼굴로 앞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으로 액정을 쓸어올리면서 욕설을 뱉었다. 나에게 하는 욕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허겁지겁 음식물을 쑤셔 넣기 싫었고, 차라리 밥을 남기는 게 나았다. 집에 오면 폭식을 했고 그 때문에 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3년을 버텼고 부장님의 배려로 야간대학에 들어갔다. 산업체 전형으로 2년제 대학을 다녔고 졸업과 동시에 회사를 나와 4년제 대학에 편입했다. 이력서에는 고등학교 이름을 적었지만 두 개의 대학교 이름으로 학력을 추가했으므로 누구도 나를 특성화고 졸업생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나는 학사 학위를 취득한 사회인이었다. 인사 규정 결격사유에도 해당하지 않고 지역 소재 대학 졸업자 또는 거주자, 디자인 관련 프로그램 사용 가능자 우대조건에 포함되는데도 원하던 직장에서 다년째 떨어졌다. 재단에서 제시한 네 개의 우대조건 중 외국어 능통이나 예술경영, 또는 예술학 관련학과 졸업생이 아니어서일까.
모로코로 가는 차 안에서 영화 〈카사블랑카〉가 흘러나왔다. 카사블랑카는 하얀 집이라는 뜻의 모로코 항구 도시 지명이지만 영화는 전부 할리우드 세트장에서 찍었다고 했다. 영화 속 험프리 보가트가 운영했던 ‘릭의 카페’ 역시 영화 흥행 후에 모로코에 재현해놓은 것이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차량 뒤편에서 감탄과 탄성이 들렸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방금 그게 대포 소리였나요? 아니면 내 가슴이 뛰는 소리였나요?
일행들은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를 흉내 냈다.
여행 다니면 부자 된 느낌 들지 않아요?
지구상에서 우리가 제일 행복한 여자들이에요.
또 들리는 웃음소리.
저는 경비를 늘 일시불로 지불해요. 갔다 와서 돈 갚는 게 싫어서. 그래야 또 다음 여행을 준비하죠.
3명만 와도 천만 원이잖아요. 우린 둘이 왔으니 6백 들었지만. 어쨌든 두 달 월급이죠.
한 달에 3백을 벌려면 어떤 회사에 들어가야 할까.
외할머니는 언제나 박카스와 ABC초콜릿만 반겼다. 웬 궁상이냐고 엄마가 투덜거렸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기 전 외할머니와 소래포구에 간 적이 있다. 외할머니는 비단멍게를 한참 쳐다보더니 주인에게 세 마리만 달라고 했다. 엄마에게 봉지를 건넸지만 엄마는 멍게를 질색했다. 나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유 엄마, 이거 뭐 하러 사셨어요? 드시지도 않을 거. 엄마가 나무라자 외할머니는 그냥 한번 사보고 싶었다고 했다. 남들 사는 거 나도 한번 사보고 싶었다고. 난생처음 생존이 아닌 호기심에 비용을 지불한 것이다.
룸메이트는 선택관광을 하고 온 뒤 꼭 감상을 전했다.
플라멩코는 다른 데서 못하는 경험이니까. 한 번은 볼만했어.
마차에 앉아 있으니까 은근 폼나더라. 달그락달그락 말발굽 소리도 듣기 좋았어.
알함브라 궁전인가? 우리 딸이 그 드라마 챙겨봤거든. 현빈 나오는 거. 낮에도 보고 밤에도 봤다고 자랑하려고 열심히 사진 찍어서 보냈지.
방 짝꿍은 이번에도 화장실과 가까운 침대를 쓰겠다고 했다. 나는 창가 쪽 침대에 짐을 부렸다. 씻기도 전에 노트북을 꺼내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여성복지관, 노인복지관, 구립도서관, 문화재단, 평생학습관, 도서관협회 홈페이지에 차례로 들어갔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직원모집 공고문을 게시하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숙소에 도착하면 습관처럼 그 일을 반복했다.
정말 수돗물은 받으면 안 될까요? 어차피 끓여서 먹을 텐데. 100도 이상이면 세균도 다 죽잖아요.
유럽은 석회수라 끓여도 가루가 남는다던데?
현지인들은 그 물로 요리하는 거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다 생수로 감당해요?
나는 진지했지만 룸메이트는 아닌 것 같았다.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핸드폰으로 보석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와 그래봤자 며칠인데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갈등하게 했다. 5백 밀리 생수가 1유로나 하는데.
돌아다니면서 마시는 물과 찻물 용으로 쓰는 것까지 하루에 두세 병을 소비했다. 물값으로 매일 삼사천 원이 나갔다. 시내에서 운 좋게 가게를 발견하면 0.5유로에 살 때도 있었지만 일정이 빠듯한 단체관광은 언제나 시간에 쫓겼다. 이삼십 분간 주어지는 자유시간에 물병을 찾아 거리를 헤맬 수는 없었다.
룸메이트는 호텔 서비스 팁을 한 사람당 1유로씩 줘야 한다고 했다. 방 하나에 1유로 아니냐고 묻자 법으로 정해진 건 없으니까 형편대로 하라고, 본인은 습관이 돼서 아침에 짐 싸면 바로 1유로를 꺼내게 된다고 했다. 룸메이트가 텔레비전 앞에 꺼내놓은 팁에 내 돈을 보탠 적은 없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메이드들이 참 안됐다고 그녀가 혀를 찼을 때 그런 판단은 틀렸다고 따지고 들었다. 성실하게 노동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람을 동정하면 안 된다고.
포르투갈 국경을 넘은 뒤 가이드가 데리고 간 숍에서 포르투와인을 카드 결제했다. 30유로짜리를 시음했는데 내가 산 건 50유로짜리였다.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인솔자와 가이드가 내 근처에서 속닥거리며 키득댔을 때 나는 움찔했던 것 같다. 술 안 좋아하세요? 인솔자가 물었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직 어려서 술의 진가를 모르는 거 아닐까요? 가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을 아는 사람이 술맛도 안다고 하잖아요.
내게만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까?
선생님들, 포르투와인은 주인을 위한 술이에요. 격려하고 싶은 날, 축하하고 싶은 날 집에서 가장 비싼 잔에 따라 천천히 음미하면서 드셔보세요.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아닌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해를 가득 받으며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근처 맛집에서 사 온 음식을 저녁으로 먹는다. 설거지 후에는 차를 마시며 읽던 책을 마저 보고 블로그에 책 리뷰를 올린다. 주말에는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이 아닌 4K 시네빔과 100인치 스크린의 조합으로 영화를 보는 나. 협탁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드는 내 표정은 영화에 푹 빠진 것 같다. 사회적 위치, 자아실현의 욕망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외부 자극에 젖어 들어 있다. 가깝게 지내지만 사생활은 터치하지 않는 친구와 오늘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방금 본 영상은 어땠는지 이야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 나에게도 꿈꿀 자격은 있으니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라고, 『보물섬』으로 유명한 작가 있죠? 그분은 와인을 병에 담긴 시라고 표현했대요. 역시 작가답죠? 음식의 가치는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포르투와인은 여기서밖에 못 사요. 언제 또 포르투갈에 오겠어요? 가족, 친지분 선물도 오늘 다 구입하세요.
밤에 도착한 호텔의 기념품점에서 12유로짜리 포르투와인을 발견했고, 나는 울고 싶었다. 손에 든 것과 똑같은 건 아니었다. 병의 모양도 제조사도 달랐다. 카타리나가 데려간 특별한 상점이 아닌 호텔 기념품점에서도 포르투와인을 팔고 있을 줄 몰랐다.
여행사에 낸 목돈만큼 보상받으려고 기를 썼다. 이른 아침의 호텔 뷔페는 배부를 만큼 먹었고, 식당 테이블에 음식이 차려지면 허기지지 않아도 포크와 수저를 움직였다. 경비에 식사가 포함됐기 때문이었다. 하루 세끼를 꼬박 먹은 탓에 등뼈 사이사이까지 군살이 붙은 느낌이었다.
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관광객의 눈요깃거리로 전락한 옛 귀족마차는 타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행이 플라멩코를 볼 때, 알람브라 궁전 야경을 감상할 때, 알바이신 지구 야시장을 돌 때, 동네 술집에서 하우스 맥주를 마실 때 나는 숙소에 있었고, ‘여가’를 즐긴다고 생각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낮에 쓴 경비를 메모했다.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내 여행의 권리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나는 떠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떠나도 되는 사람인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가.
비행기를 타보지 않았던 나. 다른 나라는 꿈도 못 꿨던 나.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달랐다. 날개 달린 항공기를 탔고, 유럽과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적지를 방문하고, 문화와 종교, 정치가 뒤섞인 건축물을 보고,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음식을 먹고, 하얀 시트가 깔린 호텔에서 잤다. 하지만…….
가짜로 웃으면서 진짜인 척 뇌를 속이는 데는 실패했고.
나는…….
다섯 보 전진했다가 다섯 보 후진한 사람. 나는 결국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절망하는 사람인가, 열 걸음을 걸었다고 내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인가.
나에게 지난 열흘은 일상에서 벗어난 탐색과 탐구의 시간이었다. 방바닥에서 쌕쌕대며 숨을 걷어차는 대신 촤르르 촤촤─, 부르릉 붕붕─ 활동하는 소리에 내 호흡을 묻힌 시간이었다.
나에겐 여행이, 수백 킬로미터의 땅과 바다를 가로질러 낯선 곳에 떨어져서는 다른 바람, 다른 냄새를 맡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을 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수많은 도시를 내 고집이나 성격, 자의식을 투영하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서른 살 즈음의 여자가 아닌 흑발의 동양 여자라든가 여행객, 또는 이방인으로 노출된다는 게 어떤 건지 떠나오기 전에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뭐가 됐든 굉장했다. 각오 없이 온 덕분에 가볍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약자라고 여겼던 나를 큰 그림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지만 어쩌면 더 커질 수 있었다. 나는 왜 내게는 남은 시간이 없고, 40년 50년이 아니라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비련의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 왜 곧 생을 마칠 것 같은 사람처럼 지독하게 피곤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을까?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직 죽지 않은 나는 표를 들고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