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라꾸
그 인간 망종이 변했다고요? 과거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요?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고 상처가 치유될까요? 궁지에 몰리자 마지못해 시인한 걸 두고 사람이 변했다고 그럽디다. 글쎄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런 사람은 타고난 근성이 돌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힘센 자의 코스프레를 아는가요. 판라꾸 씨는 힘이 세지요. 판라꾸 씨는 힘이 세고 뒤가 든든하기에 가끔 자신에겐 푼돈에 불과한 기부금도 내고 생색을 냅니다. 사진발이 좋으면 더욱 좋지요. 사회면 하단에 기부금을 쾌척한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라도 나오면 그저 유쾌하게 웃어줄 뿐. 어디 그뿐인가. 연말이면 노인회나 노인정에 과일 상자도 돌리고 회식비도 가끔 내기도 하지요. 판라꾸 씨는 계산이 빨라. 간혹 자신보다 힘센 자가 오면 손바닥을 비비며 연신 허리를 굽히지. 담당 공무원이 내려오기 전에 미리 뇌물을 써서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데는 선수지요. 아직도 뇌물이나 약발이 통하냐고? 이 양반, 안 되겠구먼. 돈이라면 죽은 놈도 벌떡 일어나는 세상인데. 젊은 기자 양반, 내 얘길 들어보세요.
독재가 군림하던 시절, 대다수 언론은 자본과 권력 앞에 비굴하게 엎드리더라고. 이 세상에 돈보다 더 무서운 게 있을까요. 힘도 없고 돈이 없으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말입니다. 하기야 요즘엔 돈이나 권력보다 무서운 설법이 설치고 있지만요.
오리발을 내밀던 판라꾸 씨가 결국 치매에 걸렸다지요. 분명 거짓말일 겁니다. 구십 가까운 나이에 골프를 치고 돌아다녔으니까. 지금까지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지요. 아랫물이 맑아야 더러운 윗물을 깨끗하게 만든다는 억지를 부렸지요. 예를 들자면, 목소리 큰 자가 늘 이긴다거나 달걀로 깨진 바위 가져와보라든지. 말싸움에서 지기 싫어하는 사람인 판라꾸 씨는 털어서 먼지 한 점 안 나오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했었어요.
벌건 대낮에 경찰과 군인이 몽둥이로 시민을 족치면 선뜻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소.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눈곱만치라도 후회하게 마련인데 고문의 달인인 그자는 어찌 죽음을 맞을까요. 일요일이면 판라꾸 씨는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교회를 다녔지요. 누가 가여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베드로를 존경한다는 그자는, 죽는 순간까지 살아온 흔적을 지우려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부인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지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치매 코스프레를 합디다. 여러 사람을 망가뜨린 과거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순간, 일생 쌓아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걸까요.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내 아버지 이야기를 인제 와서 물어보니 내가 아는 모든 내막을 알려주겠소.
그날 처음 나는 그를 무작정 찾아가기로 했지요. 아버지가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소릴 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놈이다! 이놈이 살아 있어.”
어버이날 기부자 명단에 판라꾸 이름과 나이가 적힌 기사가 실린 것이었지요. 사방으로 수소문해서 그가 사는 주소를 알아냈습니다. 나는 날을 잡아 판라꾸 씨가 사는 담장 높은 골목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어요. 가랑비는 내리는데 거리는 어두웠고 습기에 젖어 있었어요. 어디선가 썩은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지요. 외투 깃을 세운 나는 싸늘한 봄바람이 부는 골목 들머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따금 방범용 전등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깜박거렸죠. 판라꾸 씨를 기다리는 2시간 동안, 시선을 골목 끝 양옥 문 앞에 고정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타나질 않았지요.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 고요함이라니. 판라꾸 씨 저택을 전기 철조망이 설치된 높은 담벼락이 철옹성처럼 감싸고 있었지요.
내 아버지를 고문한 판라꾸 씨가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지요. 그가 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내 아버지에게 미안하다는 한마디 말을 하기를 바랐지요.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그를 보려고 간 건 아니었어요. 나는,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더라도 용서할 마음의 준비를 했으니까요. 가난하게 자랐지만 단 한 번도 가난을 원망한 적이 없고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어요. 고문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된 아버지를 모셨지만 단 한시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실상 눈물을 뿌린 사람은 나였어요. 대문이 열리고 그가 나타난 순간 나는 몸을 흔들며 다가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에 쥐가 났어요. 우산을 든 그는 경호원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기다리고 있었죠. 나는 빠르게 다가가며 소리쳤습니다.
“판라꾸! 판라꾸 씨죠?”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을 약간 찌푸리는가 싶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지요.
“사람을 잘못 보았군. 그는 죽었소.”
경호원이 나를 밀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군요. 쓰레기 같은 놈. 목구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올랐습니다.
“당신 고문 귀신 맞지?”
“고문귀가 뭐요? 처음 듣는 말이네.”
어렵게 대면한 판라꾸 씨는 버럭 화를 냈어요. 내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그에게 고문당해 다리가 부러졌어요. 아버지는 못쓰게 된 왼쪽 다리를 절뚝이며 때론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계시거나 평생 약방을 제집처럼 드나들었죠. 이 세상에는 억울하게 당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요. 공정이니 정의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들이 만든 그들만의 세상에서, 우리는 눈치만 보며 살아야 하나요.
가끔 주변에 나누는 판라꾸 씨의 선행을 칭찬하러 간 거는 물론 아니었지요. 사실 그가 저지른 과거의 악행을 따지러 간 것도 아니었어요. 당신 때문에 삶이 망가지고 나락에 빠져 우는 사람들에게 속죄하라고 간 거는 더욱 아니고요. 아버지가 지난 세월 흘린 피눈물을 보상하라는 것도 아니었어요. 나는 아버지를 인정해달라고 간 겁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증언할 증인과 기록이 모두 사라져버렸기에, 판라꾸에게 따지러 간 거였어요. 나는 그가 감정이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지요.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 아니기를 바랐었지요. 애초에 잘못 생각했었지만.
“매번 사죄하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사죄하라는 것인가. 사실이 아닌데 어떻게 사과하란 말인가.”
“당신이 과거를 숨기고 지금 떵떵거리고 살고 있지 않은가요. 당신이 저지른 고문 후유증 때문에 내 아버지는 평생 누워 계십니다.”
“그 시절엔 다들 그렇게 살았다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요.”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어서 꺼져. 경찰 부르기 전에.”
경호원이 날 가로막으며 내뱉은 경찰이란 소리에 나는 물러났어요.
“요즘 툭하면 역사와 민족을 들먹이는 놈들이 많아졌어. 그 시절 겪어봤는가 말이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오래 살다 보니 별 미친놈을 다 보았네. 허 내 참.”
살집 좋은 노인 판라꾸 씨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오르면서 나를 힐끗 보며 비웃었지요. 금이빨이 번뜩이더군요. 금이빨을 보니 살의가 느껴지더군요.
아버지는 해방을 두 해 앞두고 경찰서에 끌려갔데요. 일제 말기 부산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 반대를 목적으로 ‘친우회’라는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죠. 아버지가 가담한 친우회는 일제의 군사 시설, 군수 공장 파괴와 군자금 모집 등을 추진하였지요. 일제의 침탈 상황을 만방에 알리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전단을 제작해 살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죠. 그러던 어느 날 형사 판라꾸는 친우회에서 활동하던 아버지와 동지들을 체포해 고문합니다. 조선인 출신 경남 도경 고등과 외사 주임인 판라꾸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하는 자로 악명이 높았지요. 그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들어오는 독립운동가나 사상범을 매의 눈초리로 찾아내는 데 선수였어요.
“저 새끼를 잡아라.”
공단이 밀집한 거리에서 친구들과 전단을 나눠주고 있는데 형사들이 덮쳤지요. 그 형사들을 이끌고 온 자가 판라꾸였어요. 검은 도리구찌 모자를 깊게 눌러쓴 검은 얼굴에서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어요. 그가 아버지 귀를 비틀고 끌어당긴 채로 말했죠.
“이런 쥐새끼 같은 놈아. 오늘부터 지옥으로 가서 살이 찢기고 흐르는 피 맛 좀 봐야지.”
피에 굶주린 고문 귀신이라는 별명이 그때 생겼다고 합니다. 잔혹한 고문으로 유명한 노덕술은 일반 사법 경찰이지만, 판라꾸는 한술 더 뜨는 특수 고등경찰이었어요. 조방에 다니던 아버지와 친구들이 끌려갈 적 나이가 겨우 열일곱이었지요. 조방은 매콤한 ‘조방낙지’를 떠올릴 때 그 조선방직이죠. 조선방직은 식민지 노동 약탈의 상징이며 당시 국내 최대 기업이었어요. 일제는 조선에서 거둔 면화를 헐값에 사들였죠. 열악한 공장에서 일하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거대한 이윤을 거두는 제국의 회사였습니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파업투쟁이 자주 일어났지요. 압제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피와 살이 튀는 전쟁터였어요.
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뼈를 부러뜨리고 흘린 피 맛을 즐기는 고등경찰에게 끌려온 첫날부터 며칠 동안 아버지와 친구들은 다짜고짜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맞았다. 친구가 고문받으며 내지르는 비명을 옆방에서 듣는 일도 괴로웠다.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도 공포심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맞아서 까무러치기를 몇 번. 겨우 눈을 뜬 아버지는 각종 고문 도구가 걸려 있는 고문실로 질질 끌려갔다. 입술이 터지고 코에서 검은 피가 흐를 때까지 전기 고문을 여러 차례 당했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악다구니로 버텼다.
“이 새끼 봐라. 제법 강단이 있네. 얼마나 잘 버티는지 한번 해보자는 거지. 입맛 당기게 만드는 개새끼네.”
판라꾸는 아버지 넓적다리에 주리를 틀며 말했다.
“난 이름을 두 번이나 바꿨다. 나도 네 나이에 만세운동하다 붙들린 적이 있지. 그때 순사에게 맞으면서 깨달았다. 억울하면 출세하자. 출세한 신민의 제일 덕목은 천황폐하와 제국에 충성하는 일이라고. 조선인이 흘린 피와 땀이 거름이 돼서 제국의 대동아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모르는가. 희망이 없는 조선은 이제 끝났다.”
고문을 당하면서 아버지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대들었다.
“당신은 조선인이면서 어찌 같은 동족을 이리도 심하고 모질게 다루는 것이요?”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조선 놈 새끼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너처럼 사상적으로 불순한 놈들은 제국의 미래를 위해 없어져야 할 개나 돼지들이란 말이다. 너 마르크스 레닌 연맹원 맞지? 친우회는 그 연맹 하부조직이지?”
“난 사회주의자가 아니오. 일제의 수탈을 알리고 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단을 살포했을 뿐입니다.”
“지금 내게 설교하려는 것이냐? 허 내 참, 어리다고 봐줬더니 안 되겠군. 발가벗겨서 매달고 다시 처음부터 몽둥이찜질과 물맛 좀 보여줘라.”
판라꾸는 형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거꾸로 매달려 머리가 아래로 젖혀진 채 매질을 당했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반복되는 구타에 이를 악물고 몸서리치다 기절했다. 정신을 차리면 바로 옆방에서 전기 고문에 치를 떨며 내지르는 친구들 비명이 귀를 찢었다. 기절하면 찬물을 뒤집어쓰고 깨어났다. 칠성판에 손발이 묶인 아버지 얼굴에 젖은 수건을 덮고 주전자로 고춧가루 섞인 물을 코와 입에 부었다. 머리를 들고 물줄기를 피하자, 가슴과 목을 구둣발로 누르고 머리채를 잡고 물을 부었다. 기절. 회생. 반복. 다시 기절. 회생…… 반복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미경이라는 친구를 따라 친우회에 들어갔다. 미경을 짝사랑했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사귀는 중이었다. 미경은 사상적으로 투철한 투사였다. 몸은 비록 가냘프고 여리지만, 정신이 강철처럼 단단한 그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난 정말 모르는 일이란 말이야.”
아버지는 악을 썼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이 조센징 개새끼 맷집이 좋네. 이리 처맞고도 안 뒈지는 걸 보니. 안 되겠다. 그년을 이리 데려와.”
형사가 초주검이 된 미경을 질질 끌고 와서 의자에 앉히고 밧줄로 묶었다. 판라꾸는 그동안 연구한 고문을 미경에게 시험했다. 숯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얼굴과 온몸을 지졌다. 웃옷을 벗기고 가슴을 지지다가 옆방으로 데려가서 성고문해도 미경은 버텼다.
“이 악독한 년. 저놈이 너를 좋아한다지.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보자.”
바지를 올린 판라꾸는 미경을 다시 아버지 곁으로 끌고 왔다. 아버지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주리틀기를 했다. 아버지의 비명을 뒤로 하고 놈은 피가 담긴 커다란 주사기를 들고 왔다. 극도의 공포감을 주기 위해 판라꾸가 개발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었다. 놈은 미경의 얼굴에 피를 뿌렸다. 그리고 미경의 가느다란 팔의 혈관에 굵은 바늘을 꽂고 피를 여러 주사기에 가득 뽑았다. 미경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게거품을 물었다. 판라꾸는 의식을 잃지 못하게 찬물을 얼굴에 뿌렸다. 자기 몸에서 계속 빠져나가는 피를 보고 아버지의 절규를 듣던 미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판라꾸는 번들거리는 얼굴로 미경과 아버지를 번갈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젊은 년 피가 몸에 좋지. 보약이야 보약!”
소릴 지르는 아버지 입에 주사기에 담긴 피를 쏘고 난 판라꾸는 자신의 혀에 몇 방울 떨어뜨려 맛을 보았다. 그러다 고문실 벽과 천장과 바닥에 물총처럼 주사기를 쏘며 피를 뿌렸다. 피 맛에 환장한 흡혈귀였다. 눈이 뒤집히도록 피를 다 뽑힌 미경은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끌려온 친구들도 무지막지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이거 죄수들이 너무 쉽게 죽어 나자빠지네. 파리 목숨처럼 너무 쉽게 보내면 재미없잖아.”
고문 동업자인 부하 직원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판라꾸는 한동안 좀 더 세밀하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썼다. 판라꾸는 뜨개질할 때 쓰는 대나무 바늘 한 바구니를 가져왔다. 아버지 손발을 묶고 끝을 날카롭게 다듬은 바늘을 엄지발톱 아래 밀어 넣었다. 휘저어 빼내고 다시 쑤셔 넣었다. 바늘이 부러지면 뭉툭한 바늘을 그대로 사용했다. 발톱들이 차례로 너덜거리자 이번엔 쇠집게를 들고 하나씩 뽑았다. 피범벅이 된 발톱이 안 보이자 판라꾸는 아버지의 여윈 손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판라꾸에게 손톱마저 뽑혔다.
“엄마, 살려주세요.”
아버지는 계속 주리를 트는 고문에 울부짖다가 결국 넓적다리뼈가 부러졌다. 부인하면 부러진 뼈를 또 꺾는 고문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결국 판라꾸가 써준 모든 허위 사실을 인정하고 주범이 되었다.
여기까지 내게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전합니다. 눈물을 보여서 미안합니다. 판라꾸는 피해자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목이 갈라지며 내지르는 처절한 고통의 비명을 즐기는 악마였습니다.
아버지는 고문으로 부러진 다리 통증으로 인해 잠 못 자는 건 기본이고요. 스스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아버지가 각본대로 진술했지요. 판라꾸가 재차 확인해보고 사실과 다르면 다시 고문하고 그러길 반복했어요. 잡혀갈 때 입은 옷은 그대로 조사 끝날 때까지 입고 있었지요. 열일곱 살 어린 청년들을 잡아다 왜 그리 가혹한 형벌을 가한 것인가, 판라꾸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뿐인가요. 신사 참배를 거부하던 진주교회 목사를 잡아다 고문하였고 일왕 숭배를 거부한 장로의 다리를 부러뜨려 불구로 만든 자도 판라꾸였지요. 우상 숭배를 거부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몸소 실천한 교회를 습격하라고 밀고한 자 또한 판라꾸의 친구인 목사였어요. 그 친일 목사는 나중에 학교 재단을 여러 개 설립하여 교육사업가로 변신하고 기독학교 연합회장이 되었더군요.
열 달간 지하 감방의 생지옥이 끝나자 고문으로 만신창이 불구가 된 아버지는 일제의 치안 유지법 위반 3년 형을 선고받고 김천 소년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풀려난 아버지는 부산 달동네 쪽방에서 숨어 살았어요. 아버지의 일상생활은 엉망이 되었어요. 화장실 갈 때조차 늘 주변을 살피는 피해망상증과 남자를 보면 놀라서 숨이 멈추는 대인공포증에 시달렸지요. 누군가 ‘경찰서’라고 말하거나 ‘형사’ 어쩌고 하면 가슴부터 쿵쾅거리면서 손이 떨려서 식음을 전폐하곤 했지요.
출소 후 몇 달이 지나자 낮에는 골방에 누워 병치레하다가 저녁 무렵엔 부러진 뼈가 어긋난 다리를 끌며 산동네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서 불쌍하다고 돌봐주는 일도 하루 이틀이고요. 허구한 날 손을 벌릴 수 없는 노릇이지요.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굶주렸으니 어찌합니까. 젊은 나이에 비렁뱅이가 되어 길거리에 엎드려 구걸하며 연명했습니다. 어디에 하소연할 데가 없고 차마 불구가 된 몸으로 부모님께 찾아갈 수도 없었을 거예요.
판라꾸는 해방이 오자 재빨리 사라졌습니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던 그는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요. 판라꾸는 일제시대 경찰 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자일 거예요.
‘천황에게 반기를 든 쥐새끼 같은 조선 놈들아.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해. 일본이라는 나라 때문에 미개한 조선이 문명의 맛을 보고 발전한 거 아니냐.’
이렇게 목소릴 높이던 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겁니다. 떳떳하다면 도망은 왜 칩니까. 그 짐승 같은 자도, 사람이라고 품어주는 가족이 마련한 은신처에 숨어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눈치를 보고 있었겠지요. 판라꾸는 순사의 폭력을 권력으로 느끼고 스스로 친일 변절자가 된 놈입니다. 자발적 친일파인 판라꾸는 신분 세탁의 명수이자 변신의 귀재라고나 할까요. 꺼삐딴 리를 능가하는 자였지요. 물론 소리 소문 없이 더 높이 출세한 자도 있겠지만 그 시대에 다 그렇게 살았다고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누가 제대로 처단했냐, 이 말입니다. 물론 격동의 시대였지요. 그렇게 혼돈 속에 숨어버린 판라꾸가 해방 이듬해에 다시 얼굴을 쳐들고 태연히 나타났죠.
경찰에서는 혼탁한 치안 업무를 담당할 경찰 출신을 찾고 있었지요. 이에 판라꾸를 불러서 경남도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시켰습니다. 해방 후, 미군이 반도 남쪽으로 들어와서 설치한 미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판라꾸는, 이번엔 미군정 경남도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영전했습니다. 하필이면 수사 업무 대신 회계를 선택했을까요. 당시 남한은 미국에 의해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눈치 빠른 판라꾸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처리하는 업무에 관여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일가친척과 지인들을 동원하여 토지와 공장과 건물을 헐값에 사들여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지요. 미군정에 협조하면서 뒤로 빼돌린 일본인 재산이 수억만금으로 불어나는 큰 재미를 본 판라꾸는 실업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판라꾸는 자신의 악행과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날까 두려워 서둘러 경찰 제복을 벗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준 미군정을 위해 충성의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을 겁니다. 또한 그즈음 판라꾸의 동생이 사회주의를 신봉하여 월북하는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판라꾸의 아우는 사회주의에 물들어 있었죠. 반공의 이념을 국시로 삼는 이 나라에서 판라꾸가 빨갱이 잡는 일에 한 몸을 바치지 못한 이유였을 겁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야 삶의 희망 불씨를 살려 나갔어요. 어느 정도 다리를 끌며 움직일 수 있자 걸인 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공장에 취직했어요. 가족의 도움을 받고 목발에 의지해서 스스로 걷게 되었죠. 인간성이 말살되도록 처절하게 고문당한 기억만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지요. 여전히 대인기피증이 심하고 일터와 집만 말없이 오고 갈 뿐이었어요.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도 누구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할 데가 없었죠. 법에 호소하려고 해도 제국에 충성하던 공무원과 경찰이 서슬이 퍼렇게 살아 있었으니까요.
‘시대가 바뀌었지만 우린 변함없이 그대로다. 너 하나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할 수 있어. 숨소리조차 내지 말고 조용히 숨어 있거라.’
고문 귀신 밑에서 주리를 틀었던 저승사자 놈이 찾아와서 하는 서슬이 퍼런 말에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에라 더러운 놈들의 세상.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어요. 밤이면 비명을 지르고 식은땀을 흘리셨죠.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아버지는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자신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누군가 빨갱이로 몰아서 해코지하고 붙들려 갈까봐 두려워했죠. 해방과 함께 아버지가 경찰서에 끌려가고 투옥된 기록이 모두 없어졌어요. 누가 없애버렸을까요. 아버지 스스로 자신이 고문받고 감옥에 간 사실을 증명해야 했지만 포기했지요. 피해자인 아버지가 고문받고 투옥된 사실을 증명하라니요. 아버지는 가슴이 미어지고 분통이 터졌을 겁니다.
어린 시절, 해마다 광복절이 오면 아버지는 광복동에 가서 카스텔라를 사 오셨어요.
“아버지, 오늘이 누구 생일이에요?”
철없는 내가 묻자 아버지는 대답했어요.
“오늘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다.”
“아버지 생일은 지났어. 올해 봄이었는데.”
“아버지는 생일이 두 개란다. 오늘은 내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날이야. 진정한 내 생일이지.”
열일곱 나이에 무슨 독립운동을 했을까. 한때 아버지를 의심한 적이 있었어요. 애국지사라면 정부에서 주는 새해 선물을 아버지는 받질 못했으니까요.
나는 판라꾸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불구로 살아온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한 증거를 찾아야 했습니다. 해방 전 기록과 문서들은 모두 불사르거나 없어졌지요. 가해자를 찾아가서 당신이 내 아버지를 고문한 사람이 맞냐는 질문과 그렇다는 증언. 이것이 제가 판라꾸를 만나고 싶은 이유였습니다. 처음 대면한 후로 계속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계속 거절당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쌓아온 명성과 지위에 흠이라도 날까 걱정했는지 판라꾸가 저를 불렀습니다.
자신을 비서라고 소개한 건장한 사내와 그의 부하 직원 셋이 저를 판라꾸의 집무실로 안내했어요. 긴 회랑을 지나 커다란 회의실과 연결된 대기실 안에 회장실이 있었어요. 건장한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는 회장실로 들어갔죠. 그 옆의 부하 직원들이 가관이었어요. 저를 아예 잡상인 취급하더군요.
“은행에 돈 뜯으러 오는 놈 오늘 처음 보았네. 웃기는 놈이야.”
“놔둬라. 몸 좀 풀게. 한 주먹 깜냥이나 되겠나.”
헛웃음을 픽픽 날리며 누군가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리지만 전 눈 하나 깜짝 안 했어요.
10분쯤 기다렸을까요. 회장님이 들어오시랍니다. 비서의 안내로 응접실로 들어가 다시 5분가량 소파에 앉아 있으니 일순 긴장감이 풀리고 졸음이 오는 거예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한 노인이 서 있었어요.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일어서려는데 그가 앉으며 조용히 말했죠.
“아, 앉아요.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실례가 되었는지 모르겠네. 세상이 많이 변했어. 하루가 다르게 바뀌니 나 같은 노인이 따라잡기가 쉽지 않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다가 찌푸린 웃음을 지으며 재차 앉으라고 권했죠. 풍채가 좋은 노인을 바라보니 아무 걱정 없이 풍족하게 지낸 여유가 느껴지더군요. 세월이 비껴간 듯 그의 얼굴은 주름도 별로 없고 인자한 모습이었어요. 다만 금테 안경 너머 눈빛은 간담이 서늘할 만큼 차가웠어요. 찌르는 듯한 그의 눈빛을 본 순간 나는 지금 판라꾸가 웃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어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죠.
등골이 구부러지고 주름진 아버지와 극명하게 대비되었어요. 그자를 만나면 죽여버려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판라꾸를 만나겠다는 나에게 아버지는 말했지요. 인두겁을 쓴 짐승이라고. 혹독한 고문의 기억이 닫힌 아버지의 입을 순간 열게 했던 것일까요.
“제가 오늘 온 이유는.”
그때 판라꾸가 내 말을 잘랐지요.
“알고 있네. 보게나. 내가 그간 숱한 고생을 해가며 생산 공장부터 부동산, 건설업까지 손을 대고 마침내 은행을 설립해서.”
나도 판라꾸 말을 도중에 잘랐어요.
“불필요한 얘기 하지 마시고 제 아버님 일을 도와주세요.”
“난 조금 유능한 형사였을 뿐, 그 누구를 고문한 기억이 없어. 아마 내 부하들이 서로 충성하느라 나쁜 짓을 좀 했을 거요. 지금 잣대로 보면 그렇다 이 말이지.”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지요. 판라꾸는 일제강점기 당시 자신은 경찰직 말단공무원이라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었죠. 거짓말도 하나의 방편이라는 일본식 말장난이 생각나더군요.
나도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어요. 나는 이를 악다물고 주먹을 움켜쥐었죠. 욕이라도 내지르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판라꾸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더군요. 이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하더군요.
“알아보니 자네 대학생 시절 데모를 좀 했더군. 아직도 이 나라엔 불순분자가 넘쳐. 내가 전활 한 통 걸면 빨갱이 잡는 윗분들이 득달같이 달려올 텐데.”
“제가 무리한 걸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불구의 몸으로 계시는 제 아버지가 유공자로 인정받는 일을 도와주십시오. 최소한의 바람입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내가 벌떡 일어서자 비서와 직원들이 다가왔어요.
“아 아, 그만. 그만. 너희들은 모두 밖에 나가 있어.”
모두 물러가자 판라꾸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어요.
“자. 알겠네. 내가 직접 고문한 적은 없지만 자네 부친이 독립유공자가 되도록 노력해보겠네. 그때는 다 그랬지 뭐. 그리고 족치려면 다 족쳐야지. 왜 나만 가지고 문젤 삼느냐 이 말이야. 방송이니 언론이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도 잠깐 반짝할 뿐 바로 조용해지지. 다 소용없지만, 가끔 거기도 미친놈들이 있거든. 자네 입 다물고 있게나. 증거도 없이 함부로 떠들지 말란 말이야.”
판라꾸가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안 받겠습니다.”
도대체 돈이면 안 되는 게 뭐가 있냐는 태도였습니다. 독립운동마저 돈으로 사려는 작자라니.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문밖에서 사내들이 막아섰어요.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지요. 나는 그들을 밀치고 긴 복도를 뛰어서 빠져나왔어요. 다리가 후들거렸지요. 판라꾸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괴물이었지요. 그가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한동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어요. 답답해진 나는 도서관에 가서 판라꾸에 대한 조사를 해봤어요.
자료에 의하면.
친일파의 죄를 거론한 책에 ‘주사기로 피를 뽑는 착혈 고문귀 판라꾸는 조선인 형사로서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친일 경찰로 이름이 높았기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받았다. 그러나 그해 반민특위 해체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 출신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서울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던 판라꾸는 서울에서 3회, 부산에서 1회 등 모두 4차 공판을 거쳐 최종 증거 불충분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미경 외 수많은 독립투사를 고문하고 살해했는가?”
조사관이 묻자 판라꾸는 대답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착혈 고문 사실을 인정하는가?”
“모른다.”
“도경의 수사 기록과 이감 기록을 모두 불태웠는가?”
“모른다니까!”
결정적 증언과 조사한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판라꾸는 끝내 모르쇠로 일관했다. 당시 사건 담당 조사관은 6·25 전란 와중에 통영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해방 후 아버지는 우연히 판라꾸를 자갈치시장에서 보았습니다.
곰장어구이를 즐겨 먹는 아버지는 그날도 자갈치시장 선술집에 들렀지요. 약값은 비싸서 아예 못 사 먹고 통증을 잊는 데 값싼 소주만 한 것이 있을까요. 아버지는 길거리에 흔한 날품팔이나 비렁뱅이처럼 보였을 테고,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판라꾸는 벙거지를 눌러쓴 변장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자의 목소리는 아버지 기억에 갈고리처럼 걸려 있었죠. 판라꾸가 고문을 할 때 흥분해서 내는 톤이 높은 쇳소리가 들렸기에 등골이 오싹해진 아버지는 순간 고개를 돌려보았죠. 아버지가 사람을 피해 돌아앉은 자리 맞은편 구석에는 판라꾸 일행 5명이 원탁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판라꾸가 구금에서 풀려나서 남해안 지역으로 돌아다닐 무렵이었어요. 심장이 쿵쾅거리는 아버지는 판라꾸를 알아보았어요. 드디어 하늘의 도움으로 악마를 죽일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죠. 이내 마음을 조금 가라앉힌 아버지는 손을 떨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죠. 나이가 연장자인 사람이 눈치를 살피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지요.
“경남 삼총사 중에서 진주나 마산보다 부산 기술이 최고라 할 수 있지. 내가 좁은 나무상자에 물건을 가두고 대못을 박거나 쇠를 빼는 기술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네. 착혈 기술은 자네가 개발한 최고의 경지여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무릎을 쳤지. 자넨 역시 최고야.”
“아이고, 무슨 과찬의 말씀을요. 선생님이야말로 모든 기술을 개발하고 집대성한 살아 있는 교과서 아닙니까. 존경합니다.”
“하하. 역시 부산 기술자는 남다르군.”
“노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여기 후배들을 잘 지도해주십시오.”
“자, 그간 고생했으니 한잔합시다.”
아버지는 술잔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작정 술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공포의 전율과 절망의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술병째 나발을 불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흉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지요. 포장마차 바닥에서 어른 손바닥 크기의 돌을 주워 들고 놈의 머리를 박살 내려고 술집으로 돌아왔죠. 판라꾸 일행은 이미 사라진 후였죠. 노 선생이라고 불리던 자가 노덕술이었을 겁니다.
노덕술 역시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즉시 유람 삼아 부마지역으로 왔을 때 같은 처지인 판라꾸와 여러 번 만나기도 했을 겁니다. 만나서 서로 고문 기술이 뛰어나다 추켜세웠나봐요. 둘은 서로 고문 기술을 몸소 시연하며 자랑질했겠죠. 이런 고문 기술은 훗날 노덕술의 제자 이근안에게 전수되었을 거예요.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 경찰들은 모두 전쟁 전후 빨갱이 잡는 일로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지우려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판라꾸는 이제 경상남도 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죠. 정치인으로의 변신은 실패한 거죠. 부산 사람들은 판라꾸의 과거를 잊지 않고 있었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정치인이 되려다 실패한 판라꾸는 더욱 철저한 사업가로 변신하였습니다.
사회정의가 밑바닥을 치던 그즈음 판라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서류가 준비되었으니 자신의 사무실에 들르라더군요. 저는 신용금고 건물에 있는 판라꾸에게 갔어요. 판라꾸가 쓴 서류에는 단순히 자신이 일제시대 부산에 근무하던 경찰이었고 제 아버지가 잡혀 온 사실이 있고 이런저런 죄상으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고 적혀 있었죠. 일종의 독립운동 증명서였죠.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고문을 한 비밀경찰인 고등경찰이었던 자신의 과거는 쏙 빼버렸더군요. 서류를 챙겨 돌아서려는데 그가 나를 불러세우는 바람에 잠깐 헛소리를 들었죠.
“우리나라가 많이 좋아졌네. 옛날로 치면 전과자가 독립운동가로 변하는 지금이야말로 공정한 사회가 아닌가.”
그들끼리의 공정이겠지요. 정의롭지 못한 지난날 잘못을 따질 때, 친일파 앞잡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지요. 탈탈 털어서 먼지 한 점 안 나오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판라꾸는 말했어요.
“내게서 돈 받아먹은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공무원이고 경찰이고 돈 받고 입 싹 닦는 놈도 더러 있었지만 결국 우리가 뭐 남인가. 서로 돕고 살아야지.”
돌아서서 한마디 하려는데 경호원이 눈을 부라렸죠. 말이 통하지 않는 벽창호와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억울한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삼켰어요.
“그 누구든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야! 그리고 친일 좀 했기로서니 그게 친북보다 더 나쁘겠는가.”
판라꾸 씨의 변명은 끝이 없었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는 정치인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그는 시의원 선거에도 뜻을 두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죠. 신용금고 사업으로 번 돈으로 그는 고향에 돌아와 청사를 신축하는데 기금을 희사하거나, 크고 작은 일에 기부금을 내는 등, 고향을 빛낸 유명 인사가 되었어요. 어버이날 부산시장의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화려하게 신분을 세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의 약점인 친일 행적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다름 아닌 독립운동 증명서 때문이었어요. 증명서를 써준 일은 판라꾸의 일생일대 실수였죠. 침묵으로 살아왔던 내 아버지가 드디어 말을 하기 시작했지요. 자신이 판라꾸에게 고문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장애인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에 알렸습니다. 그게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으면서 증언할 용기가 생기신 거죠. 아버지가 마음의 용기를 되찾자 그의 죄상이 다시 드러난 것이죠. 판라꾸가 저지른 친일 죄상과 고문 사실이 하나둘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난 여론이 비등했어요.
그러자 판라꾸는 2000년 1월 17일 《대한매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라고 반성하는 척했어요.
하지만 2000년 12월 판라꾸의 고향 면에서 발간된 면의 역사에는 판라꾸 집안 문중의 반발로 그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었습니다. 면사를 쓴 대필작가를 불러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그 어른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 전라도 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라거나 외지인 주제에 지역 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고 비난했어요. 결국 판라꾸 부분은 삭제되었으나, 작가는 자신의 마지막 양심을 편찬 과정 후기 형식으로 끼워 넣었죠. 문중은 뒤늦게 ‘죽일 놈 살릴 놈’ 했지만, 이미 책은 인쇄가 끝난 뒤였죠.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0여 명 명단을 발표하였을 때 명단에 든 인물 중 판라꾸는 유일한 생존자였습니다.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덮치던 날 판라꾸는 92세의 일기로 사망했지요. 온갖 호강과 천수를 다 누리고 그 악명 높았던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고문으로 얻은 지병으로 고생했던 내 아버지도 판라꾸가 먼저 죽는 걸 기다렸다는 듯 돌아가셨죠.
평생을 불구로 살아온 불쌍한 아버지. 일제의 만행을 잊지 말아라. 나라가 있어야 자유가 있는 거니까. 자식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심는 것도 잊지 말아라. 아버지는 유언을 남기고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법과 권력의 완결판은 정치였어요. 법과 권력이 언론과 힘을 합쳐 정치 사건에 깊게 관여하다가 성에 차지 않으면 아예 정치판을 먹어버리는 거예요. 친일 재산조사위는 이명박이 해체했어요. 친일파와 그 후손들에게 면죄부를 준 거였어요. 무덤 속에 있는 판라꾸는 지금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나만 갖고 그랬냐고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로 뻔뻔하게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친일파 청산조차 이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오늘 나는 판라꾸의 이름을 뼈에 새기듯 고발합니다.
어느 독립운동가의 후손 분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몇 번 뵐 기회가 있었지요. 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 내 가슴을 치는 몇 마디가 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우리 민족이 아니었지요.”
갑작스러운 말씀에 멀뚱히 바라보니 그분이 덧붙였죠.
“진짜 해방된 것은 친일파였지요.”
아직도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내게 그분은 말했어요.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잘 먹고 잘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본 놈들 지배 아래에 있었던 거잖아요. 경찰서장도 일본 놈이었고 관리도 높은 직책은 일본 놈들이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나고 자기들 위에서 지배하던 놈들도 다 사라지자 무주공산이 된 그 자리를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친일파들이 차지했잖아요. 경찰서장이고 장관이고 죄다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 해방된 자들은 바로 친일파 아닙니까?”
“백번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가 고문받으며 이를 악물고 판라꾸에게 절규했던 단말마들을 떠올렸지요.
“지금은 내가 너에게 이렇게 당하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그날에는 친일파인 네가 반드시 이렇게 당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네가 한 이 짓을 만인이 알아야 네가 편히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무작정 듣기 싫다고 지겹다고 진실을 덮어버리고 묻어둔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되겠습니까?
잠깐 침묵이 흐르는 사이 나는 격했던 감정을 가라앉혔습니다.
나는 A4용지 두 장 분량의 선언문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걸까요? 그래도 살아 있는 양심들이 아직 있어서 일말의 희망을 불씨처럼 간직합니다. 여기 국회도서관에서 찾아낸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문이 있어서 관련 기사 쓰실 때 때 참고하라고 드립니다.
아직도 모르쇠와 오리발을 내밀고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친일파 집안은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지요. 친일파 자손은 저택에서 살고 독립군 자손은 판잣집에서 살았죠. 친일파 손자는 국회의원이 되고 독립군 손자는 국회 수위 된다는 말이 있듯이 친일파 후손들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떵떵거리며 살고,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숨죽이고 사는데 그 누구도 잘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사설이 길어져서 날이 저물고 있네요.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답답했던 속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시간 지루한 이야길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기자가 전화기와 취재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판라꾸. 이 자의 죄를 널리 알려야 합니다.”
내가 악수를 청하는 기자의 팔을 붙들고 힘주어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저 같은 지방신문 기자가 힘이 있나요? 제 생각엔 독립운동가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자들과 친일파의 이름을 길거리 발판에 새겨 시민들이 오가며 밟아주어야 합니다. 일제의 고문으로 숨진 모든 분과 불구가 된 몸으로 버틴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께 고마울 따름입니다.”
기자의 등 뒤로 잠깐 서광이 비쳤다. 노을을 향해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나는 소리쳤다.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고 민족 반역 살인마라고 써주세요. 가해자 일본을 대신해서 친일파가 화해를 말하는 이런 세상에 제 자식이 태어나게 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