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초콜릿과 모네 미용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향이 공간을 채웠다. 오수는 우아한 동작으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실내를 오갔다. 실제로 오수는 집에 있으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오수의 집은 열다섯 평 정도 되는 스튜디오 형태의 원룸으로 패널과 책장을 설치해 공간을 구획했다. 오크 색 마룻바닥은 밝은 벽면과 대비되어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기에 침대와 카우치, 테이블과 선반 따위를 적절히 배치했다. 층고는 4미터가 넘었고, 한쪽 벽면에는 세 개의 아치형 통창이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집은 1층에 있었지만 지대가 높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시선 아래서 움직였다.
오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내다봤다.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리면 삼거리 풍경이 훤히 들어왔다. 유리창 중앙에서 남자와 여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유리창 오른쪽으로 남자가 퇴장하듯 사라지자 여자도 남자를 따라 사라졌다. 유리창 네모난 프레임 안에는 삼거리가 남았다. 비어 있는 거리에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높아지더니 나중에는 괴성으로 변했다. 쩍! 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 껴들었다. 맨살에 손바닥이 달라붙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는 없었다. 어디를 쳤을까? 오수는 궁금해서 몸을 일으켰지만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고, 맞은편 건물 지붕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까마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까마귀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을 때 유리창 오른쪽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시 등장했는데 둘이었던 그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등에 업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자 둘이 깔깔 웃었다. 남자와 여자는 유리창 가운데 한참을 머물러 있다가 퇴장하듯 왼쪽으로 사라졌다.
유리창 프레임 안에는 다시 삼거리가 남았다. 발자크 커피집과 모차르트 초콜릿집이 보였다. 그 옆 모네 미용실은 2층 건물을 통째로 썼다. 음식점과 술집 등 상점마다 밝혀 놓은 조명 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간판 위의 글자도 실제보다 도드라져 보였는데 한참을 보고 있으니 글자가 간판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곧이어 글자에 후광이 생겨나는 듯했고, 그 후광은 간접 조명과 어우러져 간판으로, 상점으로, 허공으로 이어지며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세 갈래의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도 조명 빛이 쏟아졌다. 형형색색의 빛이 겹겹으로 쏟아지는 탓에 인적 없는 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 환하게 빛났다.
쇼핑백이 담긴 유모차가 유리창 안으로 들어왔다. 샤갈의 그림처럼 환상적인 밤의 이미지를 가르며 불쑥 나타난 유모차는 선물 상자를 가득 싣고 하늘을 나는 썰매 같았다. 유모차를 끄는 여자의 손을 잡고서 어린아이가 길을 걸었다. 아이는 물방울무늬 노란 장화를 신었다. 팔다리가 긴 곰 인형이 아이의 오른쪽 옆구리에 끼어 사지를 늘어뜨렸다.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아이를 졸졸 따라 걸었다. 아이는 폴짝폴짝 뛰며 쇼핑백을 보려고 애썼다. 아이의 발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곰 인형의 늘어진 팔다리도 허공에서 풀썩풀썩 움직였다. 강아지는 폴짝거리는 아이의 발걸음에 놀라 옆으로 비켜서서는 유모차를 끄는 여자를 흘깃 쳐다봤다. 여자가 아이를 보고 미소 지었다. 아이는 여자를 따라 길을 걸었다. 강아지도 아이를 따라 길을 걸었다. 근처 성당에서 종이 울렸다. 종소리는 녹음된 것으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그들은 고개 들어 종탑을 바라봤다. 종탑에 걸린 낡은 시계 옆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붉은 벽돌집 앞을 지났다. 하얀 강아지가 벽돌집 창문을 쳐다보며 왈왈 짖었다. 어린아이가 유리창 쪽을 바라봤다. 오수는 벽돌집 유리창 안에 그림자처럼 잠겨 있었다.
오수는 개를 안고 뛰었다. 그 개는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병이 든 건지 다친 건지 원래 그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품 안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그러지 않아도 작은 몸이 점점 더 작아져서는 나중에는 손바닥만 하게 줄어드는 것이었다. 오수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몸이 들썩거리는 탓에 품에서 자꾸 개가 미끄러졌다. 부피가 느껴지지 않아 살펴보니 옆구리에 끼어 사지를 축 늘어뜨린 개가 허공에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이윽고 개의 목이 길게 늘어나더니 몸 한쪽이 지면에 닿을락 말락 하게 흘러내렸다. 밀크 초콜릿처럼 줄줄 녹아 흐르는 개의 몸이 오수의 허벅지 아래를 지나 지면에 닿았다. 흐늘흐늘 움직이는 개의 몸은 중력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는 용수철 장난감 같았는데 태양 빛에 녹아 흐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기도 했고, 고온에 액화된 유리 같기도 했다. 개는 삶과 죽음, 그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그 개는 사지를 놀이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쩌면 그 개는 현실의 세계에서 환상의 세계로 넘어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꿈과 현실 그사이에 있는지도 몰랐고, 차원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수도 있었다. 오수는 제 손에 남아 있는 개의 뒷다리를 꼭 움켜잡았다. 그러나 잡히는 것이 없어 손바닥을 펼쳐보니 개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 개는 품에서 손으로, 그런 다음 손가락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장면이 바뀌었다. 오수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 서서 그 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개는 흙탕물에 몸의 절반이 잠긴 채 또다시 죽어가고 있었다.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 속에서 그 개는 계속 죽었다. 몇 번을 죽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죽었다. 그런 다음 다시 살아나 또다시 시름시름 앓다가 작아질 대로 작아져서는 결국 죽었다. 그럴 때마다 개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개는 모습을 바꿔 계속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오수는 개를 키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개가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고, 그 개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개를 데리고 박사를 찾아갔다.
박사는 개를 저울에 올려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가망이 없습니다.
박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테크니션이라고 불리는 사람 몇이 그 개를 스테인리스 개수대로 옮겼다. 개수대 안에는 그 개와 같은 개들이 축축 늘어진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테크니션은 절인 배춧잎 헹구듯 그 개를 물에 넣고 대충 휘저은 다음 드라이어로 털을 말렸다. 그러고는 개수대 옆에 쌓인 수많은 종이 상자 중 하나를 꺼내 거기에 넣었다. 오수는 그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박사가 상자에 담긴 개를 건네며 말했다.
죽은 개를 선물 상자에 넣었습니까? 오수가 물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박사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오수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박사가 난처하다는 듯 시선을 돌리자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수가 뒤를 돌아봤다. 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각자 개를 데리고 서서 짜증스럽다는 듯 오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개를 사랑하지 않는군요. 그들이 말했다.
오수는 하는 수 없이 재킷 안쪽을 뒤적거렸다. 뭔가가 손에 잡혀서 오수는 그것을 꺼내 박사에게 건넸다. 은촛대는 품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였는데 그것을 받아 든 박사가 미소 짓고는 외쳤다.
기적입니다! 개가 살아났습니다.
박사는 호들갑을 떨며 상자를 열었다. 개가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 개가 아니었다. 그 개와 비슷한 다른 개였다. 줄 서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 아름다워라. 사랑이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오수를 에워쌌다. 박사는 이로 깨물어보던 은촛대를 재빨리 내려놨다. 사람들이 은촛대와 오수를 번갈아 보며 부러운 시선을 던졌다. 오수는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 개가 아닌 다른 개가 들어 있는 선물 상자를 가지고 돌아섰다. 출입구 쪽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가에 설치한 유리장 안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아지가 품종별로 모여 있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강아지들이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자리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유리창 밖에서 강아지를 구경하던 사람 몇이 안으로 들어섰다.
쇼가 아닌 것이 없군. 오수는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오수는 저들이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라고 믿는 가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상자의 뚜껑이 열렸고, 그 안에서 개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수가 자기 개라고 생각하는 그 개였다. 하지만 오수는 개를 키워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개가 자기 개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유리창으로 햇살이 부드럽게 비쳐 들자 숲의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바람에 나뭇잎이 이는 소리,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건드리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알람을 대신해 설정해 놓은 〈아침을 깨우는 소리〉는 오수를 순식간에 숲으로 데려다 놓았다. 아침마다 오수는 숲속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 시골 마을에 내리는 빗소리 따위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 뱃고동 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다. 소리는 오수를 대서양으로 데려다 놓기도 했고, 지중해로 데려다 놓기도 했다. 아드리아해의 바람 소리를 들으면 베니스에 있는 것 같았고, 크루즈의 뱃고동 소리를 들으면 호놀룰루에 있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 피아노 선율이 잔잔하게 흘러들었다. 그러면 집은 지중해 연안의 테라스 하우스가 되었다가 크루즈의 호화로운 선실로 변모했다. 숲속 오두막이 되었다가 스위스의 샬레가 되었다. 알람은 매일 바뀌도록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아름다운 공간 모두를 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오수는 침대에서 내려와 저울에 올라섰다. 체성분 측정 결과에 따르면 체지방이 조금 늘었는데 오수가 느낄 때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저울에서 내려와 가운을 걸쳤다. 맨살에 닿는 텐셀의 촉감이 부드러웠다. 동시에 유칼립투스 나무가 떠올랐고, 자연스레 코알라가 떠올랐다. 그런 다음은 캥거루와 호주의 드넓은 초원 같은 게 생각났다. 촉감에도 이미지가 있는 걸까, 오수는 코알라와 유칼립투스, 호주의 숲 소리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을 열자 붉은빛이 감도는 가운 끝자락이 펄럭였다. 집안 곳곳에 놓아둔 화초 잎사귀도 흔들렸다. 바람에 실려 온 허브 향이 오수의 코끝에 닿았다. 캅카스 지역과 카나리아 제도에 자생하는 로즈메리와 라벤더의 향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지역의 토양까지도 다 느껴졌다. 오수는 플랜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았다. 열대에서 자라는 칼라테아 퓨전 화이트와 오르비 폴리아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알보 몬스테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오수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지만 그만큼의 기쁨을 줬다. 붓질해놓은 듯한 커다란 잎사귀를 보고 있으면 오묘한 매력에 취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과거에는 흔한 식물이었다고 했는데 몇몇 연예인이 기르는 게 알려져 갑자기 구하려는 사람이 늘었고, 그에 따라 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했다. 오수는 그것이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같은 이유로 알보 몬스테라를 소중하게 관리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초가 주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느껴보려 애썼다.
화훼 농가 사장은 산책을 좋아하는데도 거리를 걷는 게 어렵다고 했다. 어째서 그러느냐고 묻자 사장은 가로수를 보면 나무의 가격이 보인다고 했다. 산책을 즐기기는커녕 가로수에 가격을 매기고, 그 거리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고 말하면서 너털너털 웃었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더라고요. 사장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오수도 씁쓸해졌다.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들여온 화초는 원산지의 환경과 비슷한 조건을 만들어주면 무럭무럭 자라났다. 오수는 지중해와 열대 우림, 사막 등 원산지의 토양과 기후 환경을 고려해 화분을 배치했다. 각각의 생육 환경에 따라 온도와 습도, 바람과 햇빛을 조절해주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지만 세계 각국의 공간을 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수는 온도와 습도는 물론 빛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식물 등과 가습기, 서큘레이터 따위를 설치했을 뿐 아니라 천장에도 실링 팬을 달았다. 화분 사이에 놓인 작은 실내 분수에서 물이 흘렀다. 화산석을 쌓은 뒤 맨 위에서 물이 떨어지도록 설치한 폭포 테라리엄이었다. 화산석 위 물이 닿지 않는 곳에 낙타와 기린, 사자와 순록 등 사파리를 연상케 하는 동물 인형이 놓여 있었다.
모니터에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에서 제공하는 피트니스 프로그램이 나왔다. 외국인 트레이너가 오수를 보고 인사했는데 성우의 목소리로 더빙되어 있었다. 편안하게 앉아 숨을 가다듬고 자신의 호흡을 느껴보세요.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나 혼자 있죠. 친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수는 매트 위에 앉아서 시키는 대로 심호흡을 했다. 몸이 따뜻해집니다. 이제 손바닥을 복부 위에 올려두고 따뜻한 몸의 기운에 집중합니다. 편안한 목소리에 오수는 따뜻해지는 몸을 느꼈다. 지금은 몸 외에 신경 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옷이 흐트러졌어도 그냥 놔두세요. 오수는 운동 전에 갖춰 입은 트레이닝복을 살펴봤다. 구겨진 데가 없었다. 트레이너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럼 내 몸 구석구석 피가 도는 걸 느껴보세요. 내 배의 따뜻함, 내 손바닥의 에너지. 내 심장의 에너지, 내 몸의 에너지 하나하나 느끼며 집중합니다. 이제 숨을 들이마시고, 발끝까지 들어간 공기를 크게 내뱉으세요. 오수는 숨을 들이마시고, 들이마신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오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듯 말을 이었다. 이미지가 만들어집니다. 내 몸 안에서 바다가 느껴집니다. 몸은 밀물이 되고 썰물이 되어 일렁입니다. 가슴에서 일렁이는 파도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내 몸은 바다가 됩니다. 태아의 기분으로 돌아가 보세요. 우리의 신체는 저 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우주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세요. 우주의 기운이 내 몸에 닿습니다.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이제 우리 몸의 중심을 강화하는 운동으로 넘어갑니다. 엎드려서 플랭크 자세를 시작합니다. 이 자세는 우리의 늑골, 척추, 골반을 연결하고 몸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오수는 플랭크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 몇 분을 버티느라 몸이 흔들렸다. 흔들려도 괜찮아요. 다독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운동 시간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흔들림은 줄어들죠. 오늘 이 시간을 견디면 내일은 조금 덜 흔들리게 되는 거예요. 흔들리는 것도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즐겁습니다. 독려하는 소리에 오수는 다시 몸에 집중했다.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참아보는 거예요. 더빙한 목소리는 대상이 없었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정확히 오수를 겨냥했다. 오수가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달래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하며 시간을 채웠다. 오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오전 30분의 트레이닝을 마쳤다. 트레이너는 내일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화면 속에서 정지됐다. 오수는 샤워를 한 후에 에그 베네딕트를 만들어 먹었다.
세 개의 아치형 유리창 사이 벽면에는 몇 개의 그림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림이 오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오수는 그 앞으로 다가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그림을 감상했다. 돌출된 구조물 위에 그림을 그려 입체적인 효과를 낸 작품은 유명 화가의 복제화였다. 원근법을 역으로 이용해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는데 위치에 따라 정지한 듯 보이기도 했고 움직이는 듯 보이기도 했다. 오른쪽 그림은 갤러리를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 속 벽면에 고야와 마네, 드가, 피카소와 달리 등 거장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작품이 오수 앞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졌기 때문에 마치 갤러리의 내부가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정지한 채로 보면 그림도 함께 정지했다. 그러다가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응시하면 갤러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고 집이 갤러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옆 액자에도 같은 화가의 복제화가 걸려 있었는데 거리의 상점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림은 오수의 위치에 따라 변화했고, 오수도 그에 반응하며 이동했다. 그러다가 가까이 다가가 응시하면 눈앞에 거리가 펼쳐졌고 어느 순간 오수는 그 거리에 있는 것이었다.
오수는 두 작품을 집에 걸기 위해 아트 프린트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구하기도 어려웠을뿐더러 구한다고 해도 입체적인 효과가 나지는 않을 거였으므로 고심 끝에 복제화를 주문 제작했다. 표구사 사장은 진품도 아닌데 일부러 큰돈을 들여 제작하느냐며 오수를 걱정하듯 말하고는 평면 복제화를 추천했다. 모르는 소리였다. 그는 표구 제작은 잘 알지 몰라도 예술과 아름다움, 취향과 품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듯했다. 모방에도 수준이 있는 거였다. 평면으로는 서로 조응하며 시선을 주고받을 수 없는 거였다. 안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수는 그에게 복제화를 부탁했다. 예술은커녕 장인을 만나기도 어려운 세상이었다. 유리창 맞은편 벽에 걸린 또 다른 액자 역시 그가 만든 평면 복제화였다. 17세기 스페인의 한 궁정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궁전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일종의 집단초상화였다. 작품 속 벽면에도 몇 개의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 안 그림은 어둠에 잠겨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신비감을 자아냈다. 오수는 누군가가 붓질한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게 흐뭇했고, 그림 안에 또 다른 그림이 있다는 것이 기뻤다. 작품이 무한히 재생산되어 오수의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유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오수는 열심히 노력했다.
오수는 5년 낙방 끝에 오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성우가 되었다. 처음 2년은 애니메이션과 외화의 더빙, 라디오 드라마 및 다큐멘터리와 예능의 내레이션 등 방송국의 편성대로 성우가 필요한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연기를 펼쳤다. 오수는 목소리를 연기할 때마다 그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하나하나 곱씹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이 되어갔다. 선배는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라고도 했다. 그것은 성우 학원에 다니던 시절 강사에게도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선배 성우였던 그 강사는 일상에서도 자신이 맡은 인물이 되어야만 연기를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려면 인간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작품만큼 좋은 건 없다고 했다.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연기하는 인물이 나인지, 내가 인물인지, 내가 나인지, 둘 다 나인지 둘 다 내가 아닌지 헷갈린다고 했다. 그 과정을 넘어서면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오수가 알기로는 대사를 외우는 성우도 없을뿐더러 대사를 외울 시간이 허용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성우에게 캐릭터가 되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수는 연기에도 캐릭터에도 작품에도 전형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우의 역할은 목소리의 삽입을 통해 필요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작품이 원하는 이미지를 목소리로 채워주는 게 중요했다. 그러니까 목소리도 일종의 쇼였다. 하지만 예술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오수는 알고 있었다. 오수는 늘 그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기가 지나면서는 프리랜서 성우로 활동했다.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연기를 펼치고 나왔다. 간혹 광고 섭외도 들어왔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목소리는 대개 비슷했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소수의 성우에게 광고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행히 오수의 목소리는 클라이언트가 좋아하는 목소리였다. 그중에서도 오수가 정말 좋아하는 일은 예술과 역사, 패션 등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더빙이나 내레이션이었다. 다양한 작품 안에서 오수는 18세기를 살았고, 19세기에 머물렀으며 기원전과 21세기를 오갔다. 오스카 와일드가 되었고, 셰익스피어가 되었다. 도리언 그레이가 되었고, 햄릿이 되었다. 멜빌도 될 수 있었고, 에이허브도 될 수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올랜도였다가 마그리트였고, 그보다 전에는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이었다가 신화에 나오는 신이 되기도 했다. 오수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모든 시간에 존재했으며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어릴 적 『행복한 왕자』를 감동적으로 읽은 오수는 행복한 왕자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왕자는 금장을 두른 아름다운 조각상이었고, 제가 가진 보석과 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줬는데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는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일대기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는 자신이 뭔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다음에는 오스카 와일드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아름다운 왕자처럼 보였는데 오수에게는 그것도 근사해 보였다. 그래서 그 모습을 닮고자 했다. 처음에 오수는 가죽 부츠를 신었고 드레스 셔츠를 입었다. 그러다가 돈이 조금 생겼을 때는 사파이어가 박힌 제비꽃 모양의 브로치 하나를 주문 제작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취향이 독특하다고 말했는데 오수는 그것을 칭찬으로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유행이 바뀌면서는 그런 모습을 좋아하던 사람들도 뒤에서 웃었다. 오수는 자신을 급변하는 현대에서 아름다움과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흔치 않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를 대할 때 혼자 있는 기분이 들어 슬펐다.
창밖에서 길을 지나던 상점 주인이 오수를 보고 인사했다. 오수는 여유로운 미소를 던지며 손을 들어 화답했다. 주말의 상점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개를 데리고 걸었다. 남자의 몸동작은 나른했다. 그를 따르는 희고 큰 개도 발짝을 사뿐사뿐 떼었다.
개를 데리고 걸어가는 남자는 프랑스 브랜드의 운동복을 입고, 같은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었다. 얼굴이 동그란 개는 사자만큼 컸고, 인형처럼 예뻤다. 개는 남자와 보조를 맞춰 천천히 걷다가 남자가 멈춰 서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앞발을 세우고 다소곳이 앉았는데 앉은키는 남자의 허리보다 높았다. 데이트하는 커플이 개를 보고 좋아하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분홍색 틴트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고, 커플을 바라본 후, 다시 부드러운 시선을 개에게 던졌다. 커플이 남자에게 다가와 견종을 물었다. 남자는 스탠더드 푸들이라고 답했다. 커플이 개를 만지며 호들갑을 떨자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개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푸들의 크기를 보고 놀라워했다. 개는 그런 시선이 익숙한 듯 얌전히 앉아 두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남자도 자리에 멈춰 서서는 하얗고 복슬복슬한 개털을 쓰다듬었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입을 뗐다.
포털에서 찾아본 정보에 따르면 푸들은 프랑스의 국견으로 사이즈에 의해 세 개의 버라이어티로 나뉩니다. 제일 작은 버라이어티가 토이푸들입니다. 그리고 다음이 미니어처 푸들, 제일 큰 버라이어티가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스탠다드 푸들입니다. 셋은 모두 같은 품종의 표준을 가지는 동일 견종으로 차이는 사이즈에 있습니다. 물론 가격의 차이도 상당하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버라이어티가 토이푸들이고 가장 소형입니다. 토이푸들 표준에 의한 몸길이는 개가 섰을 때 바닥으로부터 어깨의 제일 높은 위치까지의 높이, 즉 체고가 11인치, 그러니까 28센티미터 이하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예쁜 데다 키우기도 수월해 수적 우세한 버라이어티이지만 인간의 욕심이 만든 왜소증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만큼 병치레가 많지요. 인간의 욕심이 만들었지만 잦은 병치레 때문에 인간의 욕심에 반하는 아이러니한 버라이어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니어처 푸들은 중형 사이즈의 푸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견종 표준에서는 체고 11인치 이상 15인치 이하, 대략 38센티미터 이하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수가 가장 적은 버라이어티입니다. 토이푸들의 오버 사이즈는 규정상 미니어처로 분류되어 버립니다만, 기본적인 골격 구성이나 전체적인 분위기 등이 역시 미니어처 푸들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스탠더드 푸들이 있습니다. 푸들 중에서 제일 크고, 가장 오래된 버라이어티입니다. 체고의 상한 규정은 없고, 15인치 이상이 이 카테고리에 들어갑니다. 평균적인 체고는 대체로 22인치에서 27인치, 약 56센티미터에서 68.5센티미터 정도로 수컷 쪽이 암컷보다 다소 큽니다.
사람들은 남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이며 개를 만져보려고 했다.
사진을 찍으셔도 됩니다. 남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개는 자리에 앉아 눈만 깜빡거렸다.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도 점점 그쪽으로 모여들었다.
줄을 서면 모두에게 사진 찍을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사진을 찍으려는 구경꾼이 익숙한 듯 친절하게 말했다. 우리 아가가 눈을 깜빡거렸네요. 괜찮으니 다시 찍으셔도 됩니다. 커플이 사진을 찍었을 때 남자가 말했다. 그런 다음 개를 봤다. 아가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어라. 남자가 손에 쥔 목줄을 잡아챘다. 초크 체인이 개 목을 파고들었다. 개가 정면을 똑바로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옳지, 똘망한 것. 남자는 자신의 선글라스를 추켜올렸다.
사진을 다 찍고도 사람들은 그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남자와 개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몇몇 여자가 그 뒤를 따랐다.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 여자도 아이를 데리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유튜브에서 활동한다고 했다. 그러자 주위의 몇몇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갔다. 개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 뒤로 긴 줄이 이어졌다. 줄은 점점 더 늘어나서 행렬이 되었다. 남자는 사람들을 데리고 발자크 커피집을 지나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의 뒤를 쫓았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하는 사업마다 크게 실패하였고, 빚을 갚느라 하루 서른 잔에서 예순 잔의 커피를 마셨다고 했다. 몸을 각성 상태로 만들어 하루 열여섯 시간 글을 썼다고 했는데, 잠자는 두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썼다는 말도 있었다. 오수는 발자크 커피집을 보고 발자크에 대해 찾아봤다. 그런 후에 그가 느낀 감각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 더치 커피 500밀리리터를 물에 희석하지 않고 한 번에 죽 들이켰다. 더치 커피는 스무 잔가량의 커피를 짧은 시간에 마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즉각적으로 몸의 변화가 느껴졌다. 정신이 맑아지기는커녕 속이 좋지 않아 화장실에 들락날락해야 했으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눈꺼풀 아래 근육도 심하게 떨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더니 어느 순간 흐늘흐늘 늘어지는 것 같았는데 이윽고 의식이 또렷이 깨어났다. 오수는 글을 쓰는 것도 아니었고, SNS도 하지 않았다. 각성한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몸의 변화를 잠재우려면 바람이라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오수는 창가로 다가갔다. 발자크 커피집이 오수를 보고 있었다. 오수도 발자크 커피집을 바라봤다. 그때 옆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오수는 액자 쪽으로 몸을 옮겨 그림 속 거리를 바라봤다. 오수가 움직이자 그림도 따라 움직였다. 길가에는 상점이 많았다.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이 오수의 눈앞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그림 속 공간에 다른 차원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헤매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화창한 날이군. 오수는 하늘을 바라봤다. 어제처럼 오늘도 화창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오후의 빛인가! 얼마나 황홀한 시간인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다! 오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화단에 피어난 꽃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오수는 제비꽃 모양의 브로치를 재킷 왼쪽 포켓에 꽂은 채 길을 걸었다. 누군가 보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는 등이 구부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걸었다. 길가에는 상점이 많았다. 오수는 아랍 상점에서 도자기를 둘러보았고, 낙타 인형 하나를 구입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상점에서는 조명등이나 장식 거울 따위의 유리 공예품을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연초상 사장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았고, 새로 나온 제품의 정보를 들은 후에 시가 하나를 얻어 피웠다. 그러고는 모차르트 초콜릿집과 모네 미용실을 지나 발자크 커피집으로 들어갔다. 발자크 사장은 제비꽃 브로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수는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식견을 나눌 만한 상대가 없다는 것에 슬픔을 느꼈다. 발자크 사장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수는 마음을 추스르며 스탠드바에 앉았다.
오늘은 누가 된 거지요? 발자크 사장이 물었다.
저를 압니까?
그럼요.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알다니요?
오수는 발자크 사장이 자기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캐묻지 않고 음료를 주문했다.
오노레 드 발자크가 평소 마시던 커피를 마셔보고 싶군요.
그건…… 한때 유행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유행이었다고요? 오수는 발자크 커피집에 발자크 커피가 없다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
요즘은 터키식 커피보다는 지연식 커피예요.
오수는 가만히 있었다.
점 드립이라고도 불리는데 커피 진액만 뽑아내는 방식이지요. 그걸로 해드릴까요?
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타입으로 해드릴까요. 에스프레소, 아니면 아메리카노?
따뜻하게요.
아, 따뜻하게요.
발자크 사장이 스탠드바 위에 거치대를 놓고 그 위에 서버와 드리퍼를 올려놓은 다음 물을 끓였다. 그런 뒤에 원두를 계량해 그라인더로 갈았다. 민첩하면서도 섬세한 몸짓이었는데 화려하기까지 했다. 발자크 사장이 스탠드바 위에 드립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펼쳐놓고는 마술사처럼 종이를 접었다.
곡물 성분이 들어 있는 사각 브라운 필터예요. 발자크 사장이 말했다. 오일과 산, 지방 등을 적절하게 걸러내서 묵직하게 추출하죠. 다른 종이에 비해 두세 배가 비싸답니다. 그리고 브라운 필터 중에서도 이건 표백하지 않은 종이로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로 만들어지죠.
발자크 사장이 다 접은 종이를 드리퍼 안에 사뿐히 밀어 넣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 종이를 적시고는 서버에 고인 물을 죽 따라버렸다. 그러고는 드리퍼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안에 넣은 원두를 고르게 펼쳤다. 한 잔의 커피를 추출하기 위해서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기본적인 커피용품 외에 구리로 만든 크고 작은 계량컵과 드립 거치대, 저울과 온도계, 타이머 등 필요한 도구도 많았다. 발자크 사장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마치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런 다음 행위예술가라도 된다는 듯 커피에 뜨거운 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렇게 심호흡을 한 후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는 기다리기를 몇 번 더 반복했다. 바에 앉아 있는 사람 몇이 신기하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도 관람객이 되어 그를 지켜봤다. 발자크 사장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흐트러짐 없는 동작을 선보였다. 서버에 기름과 같은 커피 진액이 모였다. 발자크 사장이 서버를 빙빙 돌린 다음 유리에 남은 기름 자국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런 다음 에스프레소 잔에 조금 따라 맛을 봤다. 하아! 발자크 사장이 자기가 내린 커피에 자기가 취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 경의가 어렸다. 발자크 사장이 물을 조금 더 붓고는 서버를 빙빙 돌려 커피를 희석했다. 향이 꽃처럼 피어나는 커피가 오수 앞에 놓였다.
쇼군요. 오수가 말했다.
이미지를 쌓아 올리는 거죠.
사람을 홀리네요. 오수는 코끝에서 한번, 목에서 또 한 번, 그 향과 맛을 음미했다.
맛도 달라지죠. 어때요?
기름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역시 미각이 뛰어납니다. 지연식 드립이 아무래도 기름이 많아요. 다 마신 후에는 서버와 마찬가지로 잔에도 기름 코팅이 남아 있죠. 기름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기름 성분이 우유 맛을 이겨야 좋은 라떼가 되는데 이기지 못하면 우유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은 원리죠. 깔끔하게 뽑아내기 위한 저만의 레시피가 있는 겁니다. 묵직하게 뽑아주는 레시피에 기술이 추가되는 거죠.
훌륭하군요.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무엇을 말입니까? 오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튼 백작 부인을 열렬히 사랑했거든요. 발자크 사장이 말했다. 백작 부인은 당연히 유부녀였지만 발자크의 변치 않는 구애에 마음이 흔들렸어요. 그래서 나중에라도 혼자가 되면 그때 사랑을 받아준다고 약속한 거예요. 발자크는 그 약속을 믿고 18년을 기다렸고요. 구애한 지 18년 만에 마침내 둘이 결혼하게 된 거지요. 드라마틱한 전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혼한 지 5개월 만에 발자크는 죽었어요.
오! 슬프기도 하여라. 어째서죠? 바에 있던 여자가 그 말을 듣고 양손을 그러모았다.
그게, 아마 병 때문일 거예요. 발자크 사장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심장병이죠. 오수가 대꾸했다.
그래요. 심장병이요. 둘이 여행이라도 가려면 돈이 있어야잖아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글을 쓴 거예요. 하루 많게는 예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발자크의 이야기는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하죠.
무슨 작품을 썼는데요? 여자가 다시 껴들었다.
『인간희극』하고…… 또 많죠.
재미있어요?
발자크 소설이 다작이어서 작품마다 수준 차이가 크답니다. 그 많은 작품 중에 뭘 읽어야 할지, 뭘 읽지 말아야 할지를 선택하느라 읽지는 않고 시간만 보낸다는 말도 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오수가 말했다.
황금을 좋아해서 주위의 조롱을 받았다네요. 여자가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맞아요. 몽블랑에서 발자크 펜을 출시해 예전에 알아본 적이 있어요. 발자크의 황금 단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해요. 너무 비싸서 사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큐빅이 박힌 만 원짜리 볼펜을 쓰고 있죠.
다른 거로 한잔 더 마시고 싶은데 추천해주시겠어요? 오수가 말하고는 제 브로치를 내려다봤다.
그러려던 참입니다. 코스거든요. 발자크 사장이 오수의 브로치를 힐끔 보고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발자크 커피는 원두 16종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차별화를 이루고 있지요. 그래서 발자크에 오면 최소 5종은 맛을 보아야 해요. 소금 커피, 모카커피, 그다음에 드립도 한 잔 드셔야 하고요. 발효 커피도 있어요. 더치 커피도 있고요.
원두는 몇 그램 쓰나요. 18그램 정도인가요? 오수가 물었다.
아뇨. 저는 그렇게 적은 양은 쓰지 않고요. 22그램이나 23그램 정도요. 1그램은 그라인더 실링에 쓰고요. 아! 보고 오셨군요. 발자크 사장이 눈을 반짝이며 오수를 쳐다봤다.
무엇을 말입니까?
얼마 전에 제가 올린 영상을 보셨나 봅니다. 그거 보고 많이들 오세요.
저는 SNS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미디어인 세상에 SNS를 하지 않는다니요?
드립으로 알아서 내려주세요.
아, 예. 괜찮은 방향이네요. 맛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맛있게 내리는 법은 잘 모르지만 어떻게 하면 맛없게 내리는 건지도 모른답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여자가 웃었다. 발자크 사장이 오수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 정말 잘난체하는 게 아니라, 커피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해요. 이걸 왜 못하는 건지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정말이지 어떻게 하면 맛없게 내리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한번 맛없게 내려볼게요. 에티오피아 이디도로요. 책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모아서요. 재미있잖아요. 린싱도 안 하고, 계량도 안 하고, 물이 너무 뜨거운 건 상식에서 벗어나니까 조금 식히고. 레벨링도 안 하고 그냥 부어요.
뜸도 안 들입니까? 오수가 물었다.
뜸은 들이고요. 향이 퍼지는 동안 여기가 에티오피아의 어느 농장이라고 생각하시고 농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상급 원두는 죄다 수출하고 없으니까 하급 원두로 막 내려주는 느낌으로요. 그곳엔 커피용품도 별것 없어요. 융 드립 정도일 거예요. 눈을 감고 향을 맡으며 에티오피아로 여행을 떠나보는 거죠. 상큼한 과일 향이 느껴지죠? 발자크 사장이 드리퍼에 물줄기를 빙빙 돌려가며 원두를 적셨다. 같은 동작을 몇 번 더 반복한 다음 커피를 추출해 오수와 여자에게 각각 내어놓고는 물었다. 어떤가요?
오수는 주문도 하지 않은 여자에게 커피를 내어놓는 게 의아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딱히 부정적인 맛이 없는 것 같은데요. 밸런스가 좋은 것 같고요. 여자가 말했다.
맛이 나쁘지 않죠? 뭔가 투박한 커피다운 커피랄까? 그런데도 청포도 주스와 청사과, 귤피의 향미에 밝은 산미까지 어우러지죠. 눈을 감고 음미해보세요. 여운이 긴 커피입니다. 스페셜 커피하우스라고 하더라도 맛이 좋지는 않더라고요. 스페셜 원두로 내려도 이 맛이 안 나와요. 발자크 사장이 서버에 남아 있는 커피를 에스프레소 잔에 따라 마셔보고는 또다시 하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괜찮은데요. 아, 너무 괜찮아요. 그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는데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도 같았다.
오수는 그의 시선을 좇아 뒤를 돌아봤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도 오수가 마신 것과 똑같은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커피잔을 빙그르르 돌려 그 안에 남아 있는 기름 자국을 보며 감탄했고, 다른 사람은 잔에 남은 기름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몇몇 사람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발자크 사장의 시선에 조응하고 있었다. 바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조가 가득한 얼굴로 발자크 사장을 보고 있었다. 붉은 조명등 아래 시선과 시선이 교차하며 빛줄기처럼 펼쳐지자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찬사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때 문이 열렸다. 뼈 복장을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비급 호러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 인체 골격의 뼈를 입은 남자가 카페 내부를 스윽 둘러보더니 오수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는 입체적인 뼈가 프린팅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뼈 남자가 스탠드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수 앞에 놓인 커피를 힐끗 보고는 같은 거로 달라고 주문했다. 발자크 사장이 미소 지으며 알았다고 했다. 오수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주위를 살폈다. 사람들이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따위에 나오는 캐릭터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건지 도중에 바뀐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을까, 오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쳐다봤다. 게임 캐릭터를 코스프레한 사람도 있었고, 좀비로 분장한 사람도 있었다. 옆에 있는 여자는 파란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길게 땋아 두 갈래로 늘어뜨렸는데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했다. 오수는 발자크 사장을 봤다. 마찬가지였다. 괴상했다. 어느새 마법사가 되었는지 수정구슬처럼 커다란 유리 볼을 들고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핸드폰 카메라로 자신을 찍었다. 그런 다음 스스로 미디어가 되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전시했다.
오수는 거리로 나와 붉은 벽돌집을 바라봤다. 유리창 안에 남자 하나가 어둠에 잠겨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오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집 안이었다. 아치형 유리창으로 빛이 아름답게 흘러들고 있었다. 선반 위에는 백합 모양의 크리스털이, 그것을 사들인 5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었고, 은쟁반 위에는 해바라기 한 송이가 말라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유리 화병에 담긴 드라이 플라워, 몇 개의 액자와 인센스, 까마귀 깃털 펜, 보석이 박힌 반지 따위가 놓여 있었다.
오수가 만든 세계가 집안에 모여 있었다. 집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재연되는 오수만의 작은 무대였다. 모든 것을 복제하고 박제할 수 있었다. 화분에는 대지가 놓여 있고, 실내 분수대에서는 폭포수가 쏟아졌다. 빛과 바람을 조절할 뿐 아니라 숲과 바다를 느낄 수 있었고, 세계 각지의 풍경을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그 안에서 오수는 모든 것을 느꼈다. 그렇게 믿었다.
공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자는 더더욱 짙어졌다. 어둠 속에서 액자 안 그림이 오수를 보고 있었다. 오수가 이미지를 부르듯 이미지도 오수를 불렀다. 액자 안에는 또 다른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그림 안에서 그림이 무한히 재생산되어 오수가 있는 공간까지 흘러나왔다. 오수는 갤러리를 가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집은 갤러리가 되었다가 숲이 되었고, 바다가 되었다가 대륙이 되었다. 그러고는 오수만의 궁전이 되었다. 오수는 아름다운 왕자처럼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때 얼굴이 괴상하게 변한 남자 하나가 창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수의 얼굴에 겹쳐졌다. 겹쳐진 얼굴은 스스로 그림 속 궁전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박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