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미니멀리스트
거실 벽 중앙, 검은 바탕에 은색 바늘 두 개만 있는 시계가 걸려 있다. 숫자도 기호로도 시간 간격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오각형 시계는 그 흔한 째깍, 쩔걱쩔걱, 혹은 츠억츠억 이런 소리도 없이 돌아가고 있다. 한 달여 함께 살았던 아내는 물고기를 형상화한 바늘을 무척 좋아했다. “사무실에 갇혀 있는 나 대신 검은 바다를 마음껏 누비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그녀는 자신을 ‘선명인鮮明人’이라 했다. 그 말은 전혀 미니멀하지 않은 미니멀리스트와 구분하기 위한 신조어였다. 그럼에도 미니멀리스트라는 말을 쓰기로 한 이유는 선명인이라는 말을 설명해야 하는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녀는 선명하다는 것을 산뜻하고 뚜렷하여 혼동되지 않는 존재, 물건, 공간, 의식주를 관통하는 정확성으로 정의했다.
그녀는 바다가 그립다고 했다. 잠들기 전, 눈을 감고 자신에게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느리게, 느리게 중얼거렸다.
“먼바다로 갈수록 물색이 깊어진다. 바다는 푸른 장판에 거울 조각을 뿌려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낚시에 걸린 은백색 갈치가 서서히 몸을 뒤틀며 나타난다. 주위가 쨍하니 밝아진다. 갈치는 길고 긴 제 몸을 어쩌지 못하고 둔하게 몸을 감아올리다가는 툭, 떨어진다. 저항하는 것은 지느러미뿐. 에스 자로 너울을 만들며 부채춤 추듯 살짝 떨기까지 한다.”
나는 그녀의 독백을 듣는 것이 좋았다. 독백은 가끔 연극적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의 자신감 덕분인지 비루한 공간이 달리 보이곤 했다.
이 집도 그랬다. 우리 방 창으로 남산 전망대의 윗부분이 보였다. 창문 가까이 가서 고개를 좀 빼면 보광동과 이태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골목은 산꼭대기부터 구불구불 흘러내리다가 큰길에서 만났다. 어릴 적 문방구에서 뽑기를 할 때 위로부터 구슬을 굴려 멈추는 곳에 선물이 있었던 것처럼, 나는 미니어처처럼 촘촘한 집을 내려다보며 확실하게 당첨될 무엇이 있기를 바랐다. 사실 한 달 전만 해도, 흥감할 만큼 벅찬 선물이 당첨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내라는 선물이었다.
그녀와 내가 출판사 근처 언덕 꼭대기에 오른 건 원고 때문이었다. 작가가 실패한 주식 투자자를 인터뷰하여 쓴 책이 투자 바람을 타고 좋은 반응을 일으켰다. 석 달 동안 그들과 일상을 함께하고 간신히 마음을 열어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책을 내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겨우 잡은 주제가 ‘골목 맛집 탐방’인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작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하루에 한 끼로 버티는 훈련을 하고 있다고 했었다. 처음부터 소통이 여의치 않은 작가지만 때가 되면 원고를 보내올 것이니 굳이 독촉하는 연락을 취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감이 닥쳐도 연락이 안 되자 사장이 나더러 작가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혼자 가도 되었지만 굳이 편집 담당인 그녀와 동행한 이유는 불시의 방문으로 혼자 살고 있을지 모르는 작가가 불편해질 수 있을지 몰라서였다.
우리는 출판계약서에 흘려 쓴 주소를 찾아 나섰고, 그 집만 찾으면 사장한테 보고하고 퇴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빠르게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골목이 복잡하고 주소를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아 두 시간 넘게 헤맸다. 지번으로, 새 주소로 찾아도 계약서에 적어놓은 주소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있는 식당을 찾아다녔다. 요리를 즐기지 않는다는 작가의 특성상 직접 해 먹기보다는 대놓고 먹는 밥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로 허름한 식당을 찾았는데 핸드폰에 있는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었지만 다들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덟 번째로 들어간 식당에서 요즘도 사람을 그렇게 찾느냐는 말을 듣고 다음 식당에 들어가기를 포기했다. 포기함과 동시에 더위가 몰려왔고 무릎에 힘이 빠졌다. 작가가 하필이면 산꼭대기에 가짜 주소를 만들었는지 다시 한번 화가 났다. 나는 허탈함과 분노, 배신감 뭐 이런 익숙하고도 짜증스러운 감정에 휩싸인 채 언덕 꼭대기에 서 있었다. 키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인색하게나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텁텁한 공기를 가르며 바람이 불었고 내 곁에 서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희미한 향기가 훅 끼쳐왔다. 아카시아꽃에서 나는 냄새나 물비린내 비슷했는데 생물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숨의 흔적 같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헐렁한 리넨 셔츠의 속옷 라인을 제외한 겨드랑이와 목 뒷부분이 살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녀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더니 눈을 감고 양팔을 벌렸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뜨며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몸의 굴곡이 드러났다. 캡 없는 브래지어를 했는지 젖꼭지 부분이 약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엉덩이가 둥그렇고 부드러웠는데 대리석을 쪼아 만든 조각처럼 풍요로웠다. 샌들을 신은 발은 희고 깨끗했다. 그 모습은 뭔지도 모르고 방치해두었던 평면도를 오리고 조립하여 세워놓은 것처럼 입체적이며 생생하고도 낯설었다.
그녀는 끔찍한 더위도, 내가 곁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리듬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꾸 눈이 갔다. 나는 그녀의 행동이 편하기도 했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냥 가야겠죠?”라고 하자, 그녀가 설핏 웃었다.
“난 애초에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아무 소리 안 했어요?”
“아, 이 동네에 한번 와보고 싶었거든요. 사계절 어둑한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꼭 여기를 올려다보곤 했어요.”
“그럼 집 찾느라 부동산하고 식당에 물어볼 때도 알고 있었어요?”
“그렇죠.”
“얘기해줬어야죠.”
“그건 편집장님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이게 말예요…….”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가슴께에 달라붙은 셔츠를 떼어냈다.
“해야 할 것을 해야만 다른 걸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거든요. 아무리 일어날 일이라도 동력이 없으면 진행이 안 돼요. 그냥 늦춰지기만 하는 거죠. 이 사람은 아무도 찾아낼 수 없을 거예요. 본인만이 동력이죠. 우리가 완전히 손 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서서히 움직일 거예요.”
“왜요?”
“자기가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요.”
“심오하네요.”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하 웃었다. 그 바람에 어긋난 블록의 모서리에 샌들이 걸려 비틀 몸이 흔들렸다. 그녀의 팔을 잡아 중심을 놓치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 동네의 보도블록은 덧니처럼 겹치거나 치아가 빠진 것처럼 움푹 패어 있기 일쑤였다. 겨우내 길이 얼고 녹다가, 장마 때 흙이 휩쓸려 내려가고 쌓이면서 만들어진 단층 같았다.
웃음을 그치지 못한 그녀가 뭔가를 발견한 듯 고갯짓으로 벽을 가리켰다. 군데군데 회색 페인트가 벗겨진 벽 쪽으로 집인지 창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그 건물은 옛날 크리스마스카드에 나오는 작은 예배당을 길게 축소해놓은 것처럼 생겼다. 귀퉁이가 닳아서 나뭇결이 드러난 대문은 양쪽으로 열리는 구조였는데 페인트를 여러 번 칠했는지 울퉁불퉁한데다가 두툼하고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문 높이나 너비가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서기 힘들 정도로 좁았다.
집이 그렇게 작은 데도 답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문 앞에 두 평 남짓한 공간 때문이었다. 공간은 화단이라고 하기에도 마당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돌로 된 벽 사이에 뿌리를 박은 시금이풀이 작고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늘이 져서 드세게 크지는 못한 것 같았다. 풀의 크기와 상관없이 싱싱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는 이유는 바로 옆에 농구대가 세워져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가 농구대를 지지하고 있던 기둥을 유심히 보더니 “이 집 손자가 꽤 큰가보네. 운동을 잘하나보다”라고 했다. 어떻게 농구대 하나 보고 그 집안 가계까지 유추가 되는지 궁금했다. 내 속을 읽은 것처럼 그녀가 “저것 봐요”라며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반쪽 대문에 거칠게 찢어놓은 노트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스카치테이프로 엉성하게 붙인 종이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인즉 가느다란 줄이 쳐진 노트는 손자가 쓰는 것일 터이고, 저 높이에 공을 집어넣을 수 있는 아이라면 적어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쯤 되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농구대 높이보다 중요한 건 이 공간이에요. 두 평밖에 안 되는 공간에서 운동하려면 모든 움직임이 정확해야 하고 공을 던져 넣는 거리도 측정을 잘해야 하잖아요. 여기서 공을 놓치면 저 비탈로 굴러가게 되어 있어요. 고등학생일 가능성이 높아요. 중학생은 나름 분주해서, 대학생은 싱거워서 안 할 테니까요.”
그녀의 분석이 정확해 보였다.
‘방세놈, 천에 30’
필체가 흔들린 걸 보니 노인의 글씨 같았고, 월세는 아무리 낮잡아 계산해도 주변 시세보다 쌌다. 전화번호는 없었다. 대문 중간쯤에 고정된 둥그렇고 굵은 쇠 손잡이가 친근했다. 초인종이 따로 보이지 않아 그걸 잡고 나무 문을 두드렸다. 세 번째로 두드렸을 때였다. 집 안에서 빈 우물 속에서나 울려 나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집 안은 약간 어두웠는데 창문이 작아서이기도 했고, 한쪽 벽이 옆집의 높은 담에 가려져서이기도 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이 꽤 길었는데 뱀 허물을 걸쳐놓은 것처럼 약하고 흐릿해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와 나는 그 집을 계약했다. 둘 다 집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사장을 통해 알고 있었다. 계약서 따위는 쓰지 않았고, 할머니가 고개도 들기 힘들다는 몸짓으로 “언제 들어올 겨?” 하고는 끝이었다. 할머니에게 계좌 번호를 물었고, 우리는 계약금을 먼저 보내겠다고 했다. “알아서 혀. 방세는 매달 말에 줘야 혀. 그걸로 먹고사니께.”
그녀가 말했다. “농구공을 사면 좋겠네요.” 나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고 농구를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처럼 몇 번이고 농구대에 공을 넣는 시늉을 했다. “이사할 때 농구공 꼭 사 올게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더 이상 얘기할 내용은 아니라는 듯 무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마을버스가 있는 것 같은데…….”
“걸어가요.”
“네. 그럼 걸어요.”
하지만 50도에 가까울 만큼의 경사라 둘 다 뛰어 내려오는 꼴이 되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상가 건물 아래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바람이 시원했다. 나는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그녀가 이번엔 움푹 팬 도로에 발을 헛디뎌 휘청했고, 나는 본능처럼 그녀의 팔을 잡았다. 두 번째로 그녀와 닿으니 처음보다 훨씬 더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고맙다며 내 손아귀에서 팔을 뺐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러운 삶이야말로 내가 그리는 것이 아닌가. 나를 스쳐 간 여자들, 결혼할 뻔한 여자들은 참 이상했다. 두 몸이 하나로 녹아든 것처럼 친밀한 섹스를 하거나 자신보다 더 자기를 잘 알아주는 것 같아 충만한 만족감에 흐뭇해하다가도 결혼 얘기만 나오면 달라졌다. 그녀들이 제시한 ‘최소한의 조건’은 항상 버거웠다. 결혼을 포기하니 사람 만나기가 쉬웠지만 김이 빠져 굳이 만나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 여자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우리 결혼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녀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나쁘지 않은 거 말고 좋으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특별히 좋을 게 있나요?라고 했다. 내가 할 말이 없어 머뭇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직장과 집에서 계속 보니 24시간 근무하는 것 같긴 하겠네요.” 나는 웃었고, 그녀는 웃는 나를 바라보다가 우스워서가 아니라 내가 웃는 게 웃겨서 웃는다는 표정으로 피식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시니컬함이 세련되어 보였고, 탐구할 게 많아 보여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동료로서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갔다가, 부부가 되기로 약속한 후 급경사의 길을 뛰어 내려왔다.
그녀와 같은 출판사에서 근무한 지 2년이 넘었다. 그녀는 일찍 출근했다. 나와 사장이 출근할 때쯤이면 이미 데스크 톱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자판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일에 속도가 붙었음을 알려주곤 했다. 누가 들어오면 모니터에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어서 오세요” 하고는 말았다. 거래처에서 와도 그랬는데 보지도 않고 누군지 아는 것이 귀와 눈이 함께 달린 것 같았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부담스러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점심도 밖에서 먹지 않았고 글이 엉망이라 3교까지 끝내고도 몇 번이나 고칠 만큼 신세를 입은 작가가 너무나 고맙다며 밥을 사겠다고 해도 아니라고 자기는 이미 준비해왔다고 했다.
사장은 그녀를 좋아했다. 3년째 동결된 월급도 그녀에겐 그리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사장이 출판계가 다 죽어간다고, 이러다 굶어 죽겠다고 엄살을 떨 때마다, 단군 이래 만성 불황인 출판 시장에서 우리 회사 규모 정도로 아사할 리는 없을 거라고 했다. 사장은 내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우리의 결혼은 빠르고 간단하게 진행됐다. 연애, 밀당, 선물, 추억 쌓기, 프러포즈 기타 등등 모든 것을 건너뛰어 두 사람이 그 집에 들어앉게 된 건 일주일도 안 되어서였다. 결혼식을 생략하고 혼인신고를 마친 후 사장과 인쇄소 대표에게 메시지 한 통 돌리는 것으로 결혼 절차를 끝냈다.
생각해보면 허무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편집장으로 그녀는 교정교열팀장으로 근무하면서도 마음이 오간다든가 아리송한 감정 한번 없었고, 주위에서 둘을 놓고 어울린다 어쩐다 하고 농담 삼아 진담을 할 때도 ‘뭐라는?’ 표정으로 흘깃 쳐다보거나 못 들은 척할 만큼 아무 느낌이 없었던 사이가 바로 결혼이라니.
그녀의 짐은 정말 간단했다. 이삿짐센터는 물론 1톤짜리 트럭 한 대 동원하지 않았다. 세 번에 걸쳐 짐을 옮겼는데 그때마다 바퀴 네 개 달린 트렁크에 넣어 밀고 왔다. 내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작은 냉장고, 전자레인지, 전기밥솥이나 다리미 등 생활에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도 없었다. 이제 다 끝났다고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살던 집에서 짐을 정리하고 왔나봐요?”
“아뇨. 다 가져온 거예요.”
“전자제품은 원래 없어요?”
나는 그녀가 혼수 따위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오해할까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자파가 나를 꿰뚫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들은 악의가 있어요. 단지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한여름에 밥은 어떻게 해 먹어요?”
“아무리 더워도 한 끼에 한 번 먹을 양만 준비하면 되죠. 그래도 보관해야 하는 게 있으면 여기다 넣어요.”
그녀가 주방에 두었던, 갈색 천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가방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렁크인 줄 알았는데 손잡이와 어깨걸이가 있는 아이스박스였다.
그녀가 행거를 조립해서 세우고는 트렁크를 열었다. 나는 벽에 기대앉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트렁크에서 다섯 벌의 옷이 나왔다. 티셔츠와 청바지, 흰 블라우스와 애매한 두께의 정장 바지(그녀는 이 바지를 사계절용이라고 했다), 스웨이드 재킷과 검은색 모직 치마, 마 바지와 카디건, 오리털 파카, 부츠, 힐 한 켤레씩, 운동화, 샌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티 팬티였다. 이런 기호도 있군. 그녀가 티 팬티를 벽에 박혀 있는 못 두 개에 펼쳐 걸었다. 저절로 반말이 나왔다.
“아, 저건 뭐야? 설치 미술?”
“아니, 팬티는 항상 뽀송뽀송해야 하거든. 저기가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데야. 티 팬티는 아주 합리적인 옷이지. 필요 없는 걸 제거했기 때문에 건조가 아주 잘 돼. 그래도 꿉꿉하면 드라이어로 더운 바람 한번 쐬어주면 되고. 눅눅하고 축축한 영국에서도 저 팬티 한 장이면 됐었어.”
맞다. 그녀는 여행가이기도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근무하고 휴가와 연차를 몰아서는 두세 달 정도 여행을 하고 왔다. 그녀는 여행 중에 쓴 글을 월간지에 기고해서 비용에 보태곤 했다.
흰 벽에 티 팬티 한 장. 누군가가 와서 저걸 보면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 됐는데, 뭐 올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편안해졌다. 트렁크에서 양말, 히트텍 내의 한 벌이 더 나왔다.
“모두 해서 서른세 가지야. 이걸로 사계절 살 수 있거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둘의 눈이 오래 마주쳤는데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사람처럼 부끄럽고 간지럽고 행복했다. 그녀가 큰 보따리 하나를 끌어당기더니 매듭을 풀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두께의 이불이 한 채 나왔다. 광목으로 겉을 쌌는데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5분의 4만큼은 검은색이고 목 가까이 있는 부분만 아이보리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 닿는 부분은 거즈로 덧대져 있었다. 여러 번 빤 것 같은데도 전체적으로 톡톡하였고 풀을 먹였는지 적당히 빳빳하면서도 신선한 냄새가 났다. 철 지나 관객의 발길이 끊긴 식물원의 물기 걷힌 풀더미에서나 날 법한 냄새였다.
나는 그 이불에 환호했다.
“와, 이 이불 너무 좋다. 잠이 저절로 올 것 같아. 행복해.”
“맞아.”
그녀가 요와 이불을 꺼내 펴더니 네 귀퉁이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이불까지 각을 잡아 개서는 요 위에 놓고 기대앉았다. 그러니 낮은 소파처럼 보였다. 아, 이제 쉬어야지. 그녀와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우리 첫날밤이네.”
“아하. 그렇지.”
“사랑해. 자기 너무 좋다.”
“사랑까지는 아니지 않아? 너무란 말도 지나치고.”
“아니야. 사랑하는 것 같아. 자기랑 있는 내내 행복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뭐 때문에?”
“에이, 모르겠다. 뭘 그리 따져. 이불 때문에 그런 것 같아.”
“그건 믿겠어. 나도 저 이불 덕분에 행복하거든.”
“직업병 나온다.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가 맞는다는 거지.”
말이 끊겼고 그녀가 몸을 좀 더 눕혔다.
“이불 펴자.”
“그래.”
“첫날밤이잖아.”
“해야지.”
“아, 참. 건조하기는.”
그날 밤 기억은 띄엄띄엄 이어졌다, 끊어졌다 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와 미끄러지듯 방바닥에 퍼지던 이불. 그녀의 헐렁한 면 원피스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지려고 하자 잠깐만,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옷을 벗어 나체가 되었던 것. 천천히 일어서서 벗어놓은 원피스를 들어 티 팬티 바깥쪽으로 걸어놓던 것. 그 모든 행동이 너무나 조심스럽고 느려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몸의 윤곽이 일렁이며 달라졌고, 누워서 보는 내 눈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고…… 창밖의 어둠이 방 안으로 서서히 들어찼고, 그녀가 진회색 실루엣으로 내게 다가오고…….
나는 눈으로 이미 오르가슴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녀의 가슴을 죽일 듯 움켜잡았다. 그녀는 사무실에 놓인 책상처럼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거나, 전기 포트처럼 잠시 옮겨졌다가는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던 물체가 아니었다. 누에가 뽕잎을 먹듯 원고를 갉아먹으며 변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목 아래로 팔을 넣어 베개를 해주었다. 그녀가 내 품에 안겼다.
“아. 좋다. 안 믿어져.”
“알고 있어.”
“아주 자신만만해요.”
“왜 아니겠어?”
“맞아.”
“이제부터 하나 마나 한 말 자꾸 하면 안 돼.”
“왜?”
“나는 미니멀리스트야. 사람들은 미니멀리스트를 물건을 최소화하는 거로 알고 있지만 나는 머릿속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중 하나가 모든 것에 적합한 말을 쓰는 거지. 말 낭비를 하는 사람 보면 막 때려주고 싶어.”
“그 정도야?”
“그럼. 그건 머리가 아니라 대가리야.”
“대, 가, 리?”
“멸치 대가리, 뱀 대가리나 다를 게 없어. 그것들은 떠들지나 않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뜬 채로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한 어둠이 내린 것은 아니라서 그녀의 눈동자에 흐릿하게나마 상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그녀가 베고 있는 팔이 약간 저렸다. 방향을 바꾸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왜? 무거워?”
“괜찮아.”
“든 게 많아서 무겁긴 할 거야.”
“자기 되게 웃기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어.”
“귀여워.”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머리부터 목, 등과 엉덩이를 쓸어내렸다. 성기가 움찔 반응했다.
내 기척을 눈치챈 그녀가 내 가슴을 밀어냈다.
“이제, 각자 제자리로 미끄러져서 자자.”
“어디로 미끄러져? 내가 무슨 갈치냐?”
그녀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갈치. 맞아, 갈치. 자기 몸 같아. 부드럽고 미끄러워서 좋아. 자기 절묘하다. 멸치도 미꾸라지도 아닌 갈치. 멋있는 갈치. 우리 갈치잡이 하는 거 보러 가자. 좌판에 누워 있는 거 말고. 햇빛을 반사하는 갈치를 한번 보고 싶어. 몸이 길어 마음대로 뒤틀지도 못하는, 그래서 몸통 그대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화려한 갈치. 섹시한 갈치. 나는 그중에서 암컷과 수컷을 가려낼 거야.”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밀어내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오늘은 말을 많이 하네.”
“미니멀리스트라고 무조건 아끼는 것만은 아니야. 강약, 채울 때와 비울 때를 아는 것이지. 오늘 같은 날은 말로 잔치를 하는 거야.”
나는 하루 대부분이 행복했고, 단정했으며 그녀를 흉내 내서 회사에 있는 책상과 서랍,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그녀는 사장에게 자기는 집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사장은 두말없이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상 부부가 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불편할 것이고, 회사와 직장이 구분되지 않으면 24시간 근무하는 것 같을 것이라고 걱정 아닌 걱정도 해주었다.
그녀는 출퇴근 시간을 자신에게 투자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투자하겠다는 것은 건전하게도 운동이었다. 그녀는 다음 날부터 출퇴근 시간만큼 집 앞에 있는 농구대에서 농구를 했다. 문제는 운동복이었다. 그녀가 입은 운동복은 검은색 바탕에 팔 안쪽과 옆구리를 타고 뱀피 무늬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바지도 몸에 달라붙었는데 아무리 봐도 사이즈가 본인이 입어야 하는 것보다 두 단계는 적어 보였다. 66사이즈는 입어야 할 것 같은데 굳이 44사이즈밖에 안 되어 보이는 운동복을 꿰입는 그녀가 답답해 보였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간신이 옷을 입고 일어섰다. 온몸이 무리하게 옷에 갇혔다. 옷을 입느라 몸을 이리저리 틀며 숨까지 가빠진 그녀에게 물었다.
“너무 달라붙지 않아?”
“붙어. 이 옷이 편해질 때까지 살 뺄 거야.”
“무리일 것 같은데. 여보야. 지금 딱 좋아.”
나는 서툰 애교까지 섞어 그녀를 말리려고 했다.
“아니. 내 몸이 나야. 지금까지 가장 절제를 못한 게 이 몸이거든. 저 마당에서 운동할 거야. 멀리 안 가도 되니까 계속할 수 있겠지.”
그녀가 농구공을 들고 튀어 나갔다.
창문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골대의 높이를 가늠하듯 왔다 갔다 하더니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한 번씩 보고 지나갔다. 그들 중에는 싱긋 웃는 사람도 있고, 못 볼 걸 본 것처럼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 또래의 여자들은 파이팅하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했다. 청록색 바탕에 큐빅이 잔뜩 박힌 넥타이를 맨 사람이 대놓고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 도톰하게 부푼 성기 쪽을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여보, 그만하고 들어와. 많이 연습했잖아.”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땀범벅이 된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역력했다.
“괜찮아. 좀 더 해야 해.”
청록색 넥타이를 맨 남자가 나와 그녀를 힐끔거리더니 제 갈 길로 갔다.
“아, 제발 좀 그만하고 들어오라고.”
“왜 그래? 한 시간은 해야 해. 참견하지 말고 출근해.”
그녀는 대답을 하면서도 연신 공을 튕기고 던지고 있었다. 팔을 올릴 때마다 허리춤이 다 드러났다. 나는 2층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가 그녀를 붙잡고 대문 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붉게 상기된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왜 그러냐는 듯 힘을 주고 있는 내 팔을 밀어냈다. 그녀가 내게서 빠져나갈 것 같다는 불안감으로 운동복 바지춤을 움켜잡았다. 그녀가 간지럽다며 웃었다.
“여보야.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그런데 왜?”
“좀…… 그 뭐야. 창피하잖아. 가슴도 너무 출렁거리고, 배꼽까지 다 보이고. 남자들이 쳐다보는 거 모르겠어?”
“그게 어때서? 뛰니까 몸이 움직이고, 팔을 들어 올리니까 허리가 나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맨살을 보이는 건, 좀 그렇지.”
그녀가 정색하고 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당신 아낸데 다른 사람의 눈요깃감이 돼서 창피하다는 거야?”
“그게 아니고, 혹시 나 없을 때 누군가가 자길 노리고 집 안으로 들어올까봐 그렇지. 낮에는 자기 혼자 있잖아.”
“내 안전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였어?”
“어. 자기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남자들의 시선은 달라. 상대방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기 식대로 생각하는 거지. 예를 들어, 당신이 길에서 농구를 하고 있으면 자신을 봐 달라는 신호로 여긴다든가.”
“길이 아니라 내 집 마당이야.”
“그게 그거지. 담이 없으니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잖아.”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내 손을 뿌리치고 집 안으로 들어와 샤워를 하더니 잔잔한 꽃무늬가 있는 흰색 마 셔츠에 카키색 리넨 바지를 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가 가부좌를 틀고 노트북을 켜고는 메인 화면이 뜨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가 내 말을 인정해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파일을 열고 일을 시작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 갈게” 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간결한 그녀의 대답이 그리웠다. “나, 간다.”, “어, 가.” 나는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오면서 어, 가, 어, 가라고 구령을 붙였다. 한참 뛰다 뒤돌아보면 집 창가에 그녀가 있었다. 어떤 날은 창문 밖으로 어깨를 내민 채 두 손을 흔들었고, 어떤 날은 손끝만 보일 정도로 작게 흔들어주고는 말았다. 어떻든 그녀가 있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가 창가에서 배웅하고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 그녀가 언제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녀는 원래 깃털처럼 가벼운 사람이고 홑이불이나 티 팬티처럼 가볍게 마를 것들을 날개 삼아 펼치고 떠날 것 같았다. 그녀가 떠날 수 있다는 예상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떠났을 거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녀가 처음부터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했다가,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한 행동이 무슨 큰 잘못이라고 떠났을까 화도 났다가, 차라리 잘 됐다고 성급하게 포기해버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일상의 힘을 믿었다.
여느 때처럼 시간 맞춰 퇴근했고, 골목 초입에서 메시지를 넣었다.
‘대박집에서 뭐 사서 갈까? 세일하는 게 있으면 메시지 해?’
‘당신 먹고 싶은 거나 사 가.’
사 가라고? 이때까지도 그녀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한 바구니에 3천 원짜리 토마토를 두 바구니 5천 원에 준다고 해서 사 들었고, 두 단 묶어 천 5백 원에 파는 시금치도 샀다. 그녀는 아무리 떨이라도 필요 없는 것을 많이 사 오는 걸 싫어했다. 혹 너무 많이 사 왔다고 하면 내가 다 책임질 거라고 할 것이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비로소 ‘사 와’가 아니라 ‘사 가’라고 한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토마토를 얇게 썰어 설탕을 뿌렸다. 시금치를 다듬어 데친 다음 한 주먹씩 나누어 비닐봉지에 넣었다. 중간을 묶으면 한 장만 쓰면 되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놓았다. 한 시간 40분이 지났을 때까지도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밥 대신 설탕이 골고루 뿌려지지 않아 군데군데 다디단 토마토를 잔뜩 먹었다. 시금칫국을 끓여놓고 그녀를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밥을 말아 먹은 다음 치아를 닦고 누웠다. 밤새워 그녀를 기다리는 게 두려웠다. 그녀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사장한테 뭐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남편이 아니라 상사로서 일거리를 마무리하지 않고 떠난 그녀를 찾아 나서야 하는지, 그래야 한다면 어디로 가봐야 할지 걱정이 됐다.
그녀와 부딪힌 것이 아주 오래된 사건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녀와의 일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녀가 내려친 농구공이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잠이 깬 내가 창문으로 밖을 보았고, 공을 놓쳐 경사진 언덕길로 굴러가지 않을까 걱정이 됐고, 혹 공 때문에 사고가 나면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공을 놓치지 않았다. 골대에 들어갔을 때나 노골이 됐을 때도 날렵하게 공을 잡아냈다. 공을 놓칠 것에 대한 불안감이 가시자 그녀의 몸이 한눈에 들어왔고 사무실에서도 둘만의 방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야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녀가 말했던 싱싱한 갈치의 역동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알 수 없는 사람들 앞에 노출되는 것이 싫었다.
‘여기에서 멈췄어야 했나?’
계단을 뛰어 내려가 그녀를 끌다시피 해서 방으로 들어온 것도 내 창피함을 가리기 위한 행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을 터였다. 아니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존재가 남에게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나는 나를 야단쳤다.
‘지각을 하더라도 그녀가 이해할 때까지 대화를 했어야지!’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계를 보았다. 10시 40분. 초침이 없는 시계는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렸다가 다시 보면 1분이나 2분 정도 되는 자리만큼 옮겨가 있었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30분 안일 것이다. 그녀의 취침 시간은 11시다. 나는 적어도 11시까지는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오른쪽 자리를 남겨두고 누웠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진맥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차라리 그녀가 오기 전에 잠들었으면.
그녀가 없어도 아침은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해서 문밖으로 귀를 기울이다가 부엌으로 가서 아이스박스에 넣어놓은 국을 꺼내 밥을 말아 먹었다. 토마토도 다 먹었다. 그녀가 돌아와서 말끔하게 비운 음식을 보면 좋아할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이불을 두고 갔으니 오늘 밤에는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창문 밖으로 팔을 내밀어 이불을 턴 다음 반듯하게 개어놓고 출근했다.
회사는 ‘별일’이 없었다. 사장도 붙박이처럼 제자리에 앉아 있었고, 내 책상도 그대로였다. 그녀의 책상도, 출판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직원 둘이 빠져나간 자리도 여전하였다.
나는 안간힘을 쓰듯 사장이 아니라 빈자리를 향하여 인사를 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들릴 듯 말 듯 인사를 받는 사장의 목소리를 예상했는데, 톤이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인사를 먼저 받았다.
“어서 오세요.”
칸막이 뒤편에서 그녀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나는 반가움과 함께 집 나가서 하루 만에 돌아온 곳이 고작 사무실이라는 사실 때문에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아, 이 팀장. 일찍 출근했어요” 하는 말이 나왔다. 사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사무실이 일하기에 좋지.”
그녀가 답을 했다.
“뭐든 원래가 좋아요. 멀리 가는 것도 알고 보면 제자리로 돌아오고 싶어서일 수 있거든요.”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이번에는 사무실인데도 말이 많았다. 나는 그녀가 사장에게 어떻게 우리 관계를 설명했는지 궁금했지만 섣부르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사장과 그녀, 내가 이루는 트라이앵글 구도가 아주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그녀의 기척 하나하나가 회복의 신호가 아닐까 고민하며 하루를 보냈다.
퇴근 시간이 될 때쯤에야 결혼이라는 구도로 세 사람 간의 균형을 깨뜨리려던 내 시도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녀는 나와 살았던 한 달여 기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각자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미니멀한 구도라는 걸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퇴근 안 해요?”라고 내가 물었을 때 그녀가 말했다.
“네. 편집장님 먼저 가세요. 한 달 동안 밀린 일이 꽤 되네요.”
“이불은…….”
“선물이에요. 나도 받은 거니까. 물건도 사람도 돌아야 하거든요. 그게 궁극적인 가치이자 선순환이죠.”
나와 그녀와의 관계가 선물처럼 되려면 이쯤에서 놔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와 그녀의 궁극적 미니멀 라이프를 수용하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조용했다. 언덕 꼭대기, 그녀가 양팔을 벌리고 서 있던 나무가 보였다. 해가 지며 흩뿌려 놓은 빛의 잔영이 이파리들 사이로 사그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