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구지색

  

  경국지색이라,

  그녀는 당연히 자기가 그 정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공주병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경구지색’이란 말도 있다면 그 정도는 들이대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은 했다.
  경국지색이라면 나라 하나를 망하게 해야 하지만 경구지색이라면 구청장 한둘쯤 보내버리는 건데 그거 하나 못 꼬시겠느냐고, 그거야 뭐 품이 들면 얼마나 들겠다고.

  하지만 도대체 구청장과 자고 싶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녀와 구청장은 선거 유세 정도의 일이 아니면 아주 멀리서라도 서로 마주칠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내왔다.

  그러나 경구지색이 어쩌고 하는 알량한 자신감도 오늘 같은 날이 되면 와르르 망가진다. 경구지색 좋아하네, 경동지색이다, 아니 경통지색이다. 구청장은커녕 동네 동장 하나, 통장 하나 못 보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작 지금 사는 동네의 통반장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들이 뭐라 하지도 않는데 괜히 혼자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54.8킬로그램.

  체중계의 엄정한 통보였다. 세상에.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어젯밤의 주지육림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이다. 5킬로그램쯤 빼지 않으면 제일 좋아하는 25사이즈의 넌스트레치 청바지는 꿈도 못 꾼다. 남자들은 청바지 하면 다 같은 청바지려니 하지만 외국 사람들이 사우스나 노스나 다 코리아려니 생각할 때 다른 것만큼이나 스트레치와 넌스트레치는 다르다. 한마디로 스트레치는 남한처럼, 조금은 늘어난다. 하지만 넌스트레치는 빡빡하다. 절대로 개방되지 않는다. 그것도 넌스트레치 25사이즈는 크메르 루주나 스탈린이나 히틀러처럼 폭압적이기까지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그 잔인한 지배자를 뿌리칠 수가 없다. 조금만 정신을 팔면 금방 러브핸들이라 불리는 비계가 들러붙기 쉬운 옆구리 아래쪽이나 골반 옆, 엉덩이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부위 바로 아래쪽 같은 곳은, 쓸데없는 살덩어리가 2, 3밀리미터만 붙어도 그 청바지는 오만한 여왕처럼 완강하게 제 안에 입장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까짓 청바지, 그게 뭐 그렇게 대수냐고 하신다면 천만의 말씀. 남자들은 여자들이 청바지를 입을 때 자기네가 그렇듯 무심한 얼굴로 양다리를 두 개의 바지통에 넣은 다음 그대로 쓱, 하고 끌어올려 단추를 잠그고 지퍼를 올린 후 밖으로 걸어 나갈 거라 생각하지만, 여자와 청바지의 관계는 협상과 애원과 무력 행사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청바지의 법칙 하나, 마음에 드는 청바지는 절대 만만하게 지퍼가 올라가는 법이 없다. 남자들은 엉덩이에 터질 듯 달라붙는 청바지 뒤태의 섹시함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흉악한 고생은 절대로 모른다. 청바지의 법칙 둘,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는 여자의 모습은 아무리 절세 미녀라도 추하기 마련이다. 입이 아프도록 터질 듯 착 달라붙는 청바지 입은 뒤태를 예찬하던 남자들도 그 꼴을 보면 자기 눈을 씻고 싶을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숨을 한껏 들이쉬어 배꼽을 등뼈에 갖다 붙인다는 느낌으로 극한까지 배를 납작하게 만든 다음 단추를 잠그는데, 이 단계에서 성공하면 오늘은 로또 맞은 날이다.

  그래도 안 되면 기마 자세로 무릎을 굽히고 점점 더 엉덩이를 내리다가 이래도 안 되면 끝내는 드러눕는 수밖에 없다.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서 어깨만 땅에 붙이고 무릎과 엉덩이와 허리를 할 수 있는 한 힘껏 공중으로 치켜올리면서 바지 허리 부분을 붙잡아 끌어 올린다. 골반을 좌우로 틀면서 이 과정을 무한 반복하다 보면 청바지의 빈틈 속에 군살이 빡빡하게 채워지면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바지가 올라간다. 그때 간신히 지퍼를 올릴 수 있다면 성공이지만 거기까지 마치고 거울을 보면 머리는 산발이 되고 얼굴은 시뻘게져서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그러므로 청바지와 오늘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싶은 날이면 절대로 옷을 입기 전 메이크업을 해서는 안 된다. 이쯤 되면 청바지를 입는 게 아니라 사정사정해서 청바지님에 기어들어 가는 꼴이다.

  그녀는 바로 그 가차 없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 청바지가 인간 여자라면 남자가 아무리 구슬린다 한들 넘어가는 일 없고, 절대로 아무하고나 침대에 들어가지 않으며 저녁 11시 전에는 아무리 재미있는 술자리라 해도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며 정중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나는 잘 배운 아가씨일 것만 같아서 부러울 때조차 있다. 이 청바지가 정말로 인간 여자라면, 그 여자는 가장 좋아하는 청바지가 몸에 안 들어갈 때까지 여분의 살이 제 몸에 왔다 갔다 하도록 자신을 방치하지도 않을 것이고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지도 않을 것이며, 술에 취했을 때 소위 ‘비어 고글beer goggle’이라는 1회용 콩깍지가 씌어 눈앞의 남자가 나와 술을 열심히 마셔준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참을 수 없이 귀여워져서 끝내 자버린다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팀 내 인사 고과가 13명 중 9위가 될 때까지 자신을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그 아가씨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겁이 나 얼른 내뺀다. 보나 마나 이 여왕님에게서 돌아올 것은 서늘한 경멸뿐일 테니까.

  그녀는 모카 포트에서 커피가 끓는 동안 짧은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그 위에 목이 다 늘어날 정도로 헐거운 회색 티셔츠를 걸친 다음 허리를 굽히고 양손을 뻗어 바닥에 닿도록 쭉쭉 뻗어 스트레칭을 한다. 그녀가 가진 옷들 중 현재 입장이 가능한 옷은 이 두 벌뿐이다. 커피가 다 끓으면 맛이 쓰거나 말거나 신맛이 어쩌고 크레마가 저쩌고 그딴 건 상관없이 그저 목구멍이 데도록 벌컥벌컥 들이켠다. 맛은 무슨, 지금 필요한 건 오직 카페인, 더 많은 카페인뿐이다. 유산소 운동 전 섭취하면 더 많은 칼로리를 분해해준다는 것도 고맙지만 그것보다 빈속에 다량의 카페인을 섭취하면 머리가 핑, 하고 도는 기분이 든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 기분이다. 그러면 배가 훨씬 덜 고프다. 공복에 유산소 운동을 해야 지방이 소모된다는 건 그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다이어트 상식이다. 30분 이상 지속해야 한다는 것도 물론 잘 알고 있다. 내일은 출근해야 하니 옷걸이에 엄숙하게 걸린 25사이즈 청바지들과 44 1/2 사이즈 원피스나 블라우스에 어떻게든 기어들어 가려면, 물 한 방울도 조심하면서 오늘 대책을 세워야 한다. 164센티의 아담한 키에 54.8킬로그램이라니, 평소 정해둔 엄격한 기준에서 일탈을 해도 너무 심했다 싶어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다. 월요일까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녀는 직원이 10명 남짓인 기획회사에 다닌다. 말 그대로 매달 뭔가를 기획해대야 한다. 나라장터에서 나랏일 하는 각종 재단이니 구청이니 주민센터니 하는 곳이 만드는 사보니 사외보니 하는 곳이 외주를 주는 곳의, 한마디로 경매 입찰을 따서 먹고산다. 그들 대신 사보를 기획해서 만들어주는 회사에 다니는데, 나랏일 하는 곳들은 세금으로 먹고살고, 세금을 적게 쓸수록 칭찬을 받는다. 그래서 쥐똥만 한 이득을 내겠다고 적어내야 입찰을 받을 수 있다. 월요일에는 문화재단에서 만드는 사외보에서 문화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시의원을 인터뷰한다. 그 재단의 홍보담당자인 여직원은 그녀보다 몇 살 많은 것 같지 않지만, 공기업 직원이라는 자랑스러움이 언제나 동태전에서 기름 냄새 풍기듯 묻어난다. 자신도 배석하겠다며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었다. “월요일에, 예쁘게 입고 와요.”

  여자가 여자에게 하는 건 성희롱이 아닌 줄 아나, ×× ××××, 너나 예쁘게 입고 와 이 ××아. 하지만 그녀는 오랜 경험으로 최대한 예쁘게 하고 가야 그놈들에게서 뭔가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일어나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요일 그 건 하나만 있다면 또 모르겠다. 바로 다음 날에는 소위 ‘꿘놈’들, 그러니까 투쟁 현장마다 소위 열렬히 ‘결합’하고 있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동인’이라 불리는 문학 집단을 인터뷰해야 한다. 그 여직원은 지난 기획회의 때 이곳을 인터뷰하기로 정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또 했다. “여기도 예쁘게 하고 가야 하는 거, 알죠?” 너나 예쁘게 하고 가, ×× 같은 ××××아. 들리는 데서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갑이 을의 자리로 내려올 수는 있어도 을이 갑의 자리로 거슬러 오르는 건 본 적이 없으니까. 그 회의 때 같이 있었던 팀장도 책상을 툭툭 치며 웃었다. “들었지? 잘해.”

  사회 초년생 때는 악수하면서 손목을 살며시 건드린다거나, 인터뷰 후의 술자리라거나 하는 걸 거절하지 못해 화장실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이제는 냉소적으로 생각한다. 좌나 우나 여자 좋아하는 건 똑같다. 그런데, 우파 놈들은 적어도 양주라도 사주고 호텔이라도 가자고 하는데, 좌파 놈들은 뼈해장국 사준 다음 모텔에 가자고 하지. 어쨌거나,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예쁘장하고 아버지가 돈이 없으면 그냥 발닦개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못생기면? 예쁘면 만지고 못생기면 비웃고. 어쨌든 일을 하려면, 최소한 여자같이 하고는 가야겠지. 다시 한번, 그러니까 이 시간에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깨문다.

  안 줘, 이 새끼들아.

  그리고 놈들은 여자가 예쁘게 하고 가면 자기한테 줄 것처럼 굴었다고 주장한다. 안 줘, 안 준다고, 이 새끼들아. 그 사이에서 양을 조절하느라 이 한반도의 여자들은 얼마나 괴롭게 사는지 백 분의 일이라도 안다면 열녀문을 세우고 제사라도 지내줘야 한다.

  어쨌거나, 그녀가 지난 10년 동안 자기 몸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터득한 원리 중 하나는 그까짓 2, 3킬로그램이라고 만만하게 여겨봤자 2, 3일 이상 몸에 머물게 두었다가는 아예 제집인 양 그것들이 눌어붙어 산다는 거였다. 즉시 강제 퇴거에 들어가지 않으면 냄비 바닥에 눌은 라면처럼 지긋지긋하게 들러붙을 것이다. 운동화 끈을 바짝 당겨 매면서 그녀는 며칠간 흡수한 열량을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일단 마신 술만 해도 다음 일주일은 아무것도 안 먹고 살아가도 될 만큼 많은 칼로리인데다가 몇 군데의 술집에서 먹었던 안주는⋯⋯. 여기까지 오면 생각하기도 싫어서 입술을 더 꽉 깨문다. 아프리카의 어느 한 가족을 먹여 살릴 만한 열량을 혼자 다 먹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놓쳐서 몸 밖으로 배출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몸을 가지고 예민하게 구는 것치고 먹은 것을 자주 토하는 편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토하는 방법은 누구보다 잘 안다. 사람들은 거식증이네 폭식증이네 하고 쉽게 말하지만 그것도 말로 하듯 만만한 짓이 아니다. 그냥 토하려고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목 안쪽을 골고루 권투에서 잽, 잽, 하고 잔 펀치를 날리듯이 건드려주어야 위 안에 있던 음식물이 최소한의 기력만 소모한 채 몸 밖으로 나오고 위액 때문에 치아의 에나멜질이 상하는 것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다.

  그녀가 이 짓을 자신에게 허용하는 것은 한 달에 두 번까지만이다. 목젖을 인위적으로 자꾸 건드렸다간 백발백중 구내염이나 편도선염이 생긴다. 그러면 거식증을 앓은 그룹 카펜터스Carpenters의 보컬 카렌 카펜터Karen Carpenter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는 게 아주 성가셔진다. 카렌은 어느 기자가 당신, 사진 찍으니까 뚱뚱해 보이네요, 하고 무심코 던진 말에 그만 거식증에 걸려 큰 고생을 하다가 영양실조로 쇠약해진 심장이 심부전을 일으켜 겨우 고작 서른두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천사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노래하던 가수를 생각할 때마다 그녀는 아무 말이나 뱉은 그 기자를 흠씬 때려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 역시 이미 옛날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라건대, 부디 지옥에서 활활 불타기를! 음식물을 삼킨 다음 30분 안에 토해줘야 그나마 그것들이 살로 직행하기 전에 붙들어놓을 수 있는데 지난 며칠은 그러지도 못했다. 토할 틈도 없이 바로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럴 때 그녀는 가장 불쾌해진다. 식도염은 이미 있다. 식도암으로 발전한다는 무시무시한 신문 기사도 이미 여러 차례 읽었다. 하지만 식도암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집에서 눈을 뜬 게 아니라 어딘가의 모텔에서 눈을 떴을 때라면 더욱 싫다. 집에서라면 사후피임약이라도 먹는 기분으로 일단 욕실로 직행해 그때까지 남아 있는 음식물이라도 뱉어낼 수 있지만 남자가 제집에 안 가고 아직도 시트를 끌어안고 자고 있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우웩, 웩, 하는 흉측한 소리야 샤워기와 세면대 수도꼭지와 변기 손잡이에서 나는 소리를 교대로 적당히 사용해서 감춘다 하더라도 구토 직후의 팅팅 부어오른 토마토 같은 얼굴 꼴은 어쩌란 말인가. 어쨌거나 그녀는 오늘 카페인 이상의 음식물을 몸 안에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헤픈 여자일지는 몰라도 시럽을 듬뿍 넣은 캐러멜 모카 라떼나 아이스크림이 얹힌 와플 같은 걸 먹으면서 자신이 왜 살이 찌는지 모르겠다고 징징거리는 사람들보다는 염치가 있다. 샐러드는 살 안 찌잖아,라고 굳게 믿고 드레싱을 들이부어 우적우적 씹으면서 왜 살이 찌는지 모르겠다고 앙탈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그런 확실한 원칙이 생긴 건 사실 자기혐오가 그녀에게 확실하게 자리 잡은 다음이다. 그녀가 한때 누구보다 더 그런 여자였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요즘이야 1년에 10개월 정도는 164센티의 키에 50킬로그램 정도로 보내고 있지만 요즘은 이 정도를 날씬한 축으로 봐주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선 여자들이 어찌나 다들 점점 나뭇가지처럼 바짝바짝 말라가는지, 44사이즈에 이어 이제는 바야흐로 33사이즈라는 치수까지 등장했다. 사실상 아동복과 같은 치수의 옷들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프리free’ 사이즈? 그런 사이즈는 절대로 프리하지 않다. 그 사이즈를 프리하게 소화하려면 갈대처럼 날씬해야 한다. 바야흐로 사람이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입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 여자들은 말라가다 못해 그만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교실 안에서 교과서와 과자에 파묻힌 80킬로그램의 둥근 덩어리였던 시절이 지나고 포대 자루처럼 커다란 교복을 벗으니 그녀에겐 맞는 옷이 없었다. 대학 가면 살 빠진다던 어른들을 사기죄나 유언비어 유포죄로 고소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진실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먹으면 살이 찐다. 사과 다이어트니 디톡스 다이어트니 덴마크 다이어트니 존 다이어트니 황제 다이어트니 마녀 수프 다이어트니 갖은 짓을 다 해본 후에야 그녀는 학창 시절에 배운 것처럼,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x를 입력하면 몸은 그에 맞는 결과를 도출한다. 즉, 치즈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이나 햄버거나 프라이드치킨이나 비빔냉면 같은 걸 입력하면 몸은 그에 맞는 결과를 도출한다. 그러므로 실컷 먹으면서 다이어트를 한다는 이야기 따위는 다 사기꾼들이 하는 소리다.

  하지만 여자란, 아아 여자란, 얼마나 잘 속아 넘어가는 생물인가. 남자 역시 잘 속아 넘어가는 건 마찬가지라 하더라도 그들은 주로 사장님 이 종목에 투자하시는 건 확실합니다, 이건 지금 사두시면 돈 버는 거예요, 뭐 그런 식으로 속아 넘어가지만 여자는, 나이가 몇 살이건, 자신을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느끼게 해주는 말에는 와장창 무너지는 법이다. 그래서 백화점 매장에서 할부로 카드를 긋고, 별것도 아닌 남자가 사랑한다고 해주는 말에 모텔도 가고 도시락도 싸다 주고 놀기 좋아하는 친구 놈과 나이트에 간 게 뻔한데도 밤새워 일했다는 말도 믿어주고, 미숫가루보다 하등 나을 것도 없는 희한한 가루 요만큼에 뭐라나 하는 거창한 상표를 붙여서 다이어트 특효 식품이라며, 한 포 한 포 쩨쩨하게 포장해서 끼니때 굶어 죽지 않을 때까지 이것만 먹으면 살이 빠진다는 말에 넘어가는 생물이다. 그래서 한번 넓어진 모공이 타이트닝 세럼으로 좁아질 수 있다고 믿고서 좁아져라 좁아져라 하고 주문을 외면서 열심히 바르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지방 분해가 된다는 크림이 있다고 믿고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카드를 들고 지금 당신 머리 위에 운명의 별이 와 있다는 타로 점쟁이도 믿는다. 그걸 죄다 해본 그녀가 믿는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사주고 팔자고 별자리고 뭐고 먹으면, 살이 찐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에 과자 한 개, 떡볶이 반쪽도 쉽게 입에 대지 않는다. 그녀가 무너질 때는 오직 그것들이 알코올과 함께 쳐들어올 때뿐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 날이면 지금처럼 체중계와 청바지에게 매정하게 힐난을 받은 다음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난하며 물만 먹으며 달린다. 자신의 그런 그 꼴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한심할 거라면 라떼보다는 소맥을 마시면서 한심하겠다는 것이 그녀가 몇 개 갖고 있지 않은 삶에 대한 원칙이다. 그리고 술에 떡이 된 다음 날 햇살이 유독 환하게 느껴지고 그 햇살이 환하면 환할수록 더욱 스스로가 쪽팔리게 느껴지는 것은 주정뱅이들의 원칙이다.
  

  이렇게 굶고 뛰느니 술을 안 마시면 되는 것이고 굳이 굶기까지 하느니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66이나 77사이즈의 옷도 몇 벌 갖춰놓으면 좋겠지만 도무지 그럴 수는 없다. 그건 안 된다, 죽어도. 아무하고나 잠은 자면서, 그런 면에서만 그녀는 희한하게 엄격하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괴상하게 엄격하기 때문에 아무하고나 잘 수 있는 것이다. 고수부지에 내리쬐는 초가을의 햇살이 약간 뜨거운 것 같아서 그녀는 얼굴을 살짝 만져본다. 나오기 전 처덕처덕 발라둔 spf45 pa+++의 자외선 차단제는 아직 잘 있다. 슬슬 걸으면서 그녀는 어젯밤 누구와 했는지 생각한다.

  일본에는 처녀와 자면 수명이 60일 늘어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제 수명이 60일 늘어났다.
  처음 섹스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따져 보자면,
  그런 식으로 늘린 수명은 합산해서 대강 2, 3년은 될 것 같다.

  어느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 속설은 죽을 때가 되어 골골거릴 때 30일, 또 30일씩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녀와 잤을 때의 바로 그 시점에서 그 얼굴로 30일씩 연장된다는 거였다. 그 친구가 가진 학문적 권위라고 해봐야 일본에 배낭여행을 두 번 가본 것뿐이었지만 최근 부쩍 눈가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친구들 중 좀 덜한 편인 것과 단연 월등한 동정 섭취량이 묘하게 비례했으므로 그 말에 솔깃해하며 처녀도 아닌 거 보톡스 맞는 셈 치고 까짓 나도, 하는 식으로 동정 알아보는 비결을 묻는 친구도 있었다. 여자들이 흔히 하는 오해는 풋풋한 고등학생이나 입대 전의 대학교 1, 2학년생이나 동정일 것이다, 아직 해보지 못한 남자는 죄다 발정 난 개일 것이다, 동정인 남자는 죄다 여드름투성이에 안경을 끼고 컴퓨터 게임에나 몰두하는 촌스러운 돼지일 것이다, 뭐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그녀가 만난 동정들은 오히려 고등학생이나 대학 신입생이기보다는 스물다섯을 넘어간 경우가 훨씬 많았고 대부분 크게 떨어지는 점이 없는 평균 정도의 용모였다. 굳이 그들의 공통점을 찾자면 토크쇼에 나오는 말 잘하는 예능인처럼 깝죽거리며 잘 나서는 타입은 없었다. 대체로 이들은 발정 난 개보다는 조용한 노루에 가까웠다.

  굳이 찾으려고 한 것은 아니건만 서른 넘은 남자들도 막상 벗겨보니 동정인 경우가 일쑤여서 그녀는 종종 황당해해야 할지 황송해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들은 여자친구에게 한번 달라고 조를 만큼 뻔뻔하지도 못했고 돈 주고 해볼 만큼 변죽이 좋지도 못했고 싫다는 여자를 오빠 못 믿느냐며 확 덮칠 용기가 있지도 못해서 어영부영 살다 보니 동정을 지켰다기보다는 순결을 유지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스물네다섯 살 때 정도까지야 나 사실 처음이야, 하고 말하는 남자들이 귀엽기도 했고 어떤 남자의 첫 여자가 되는 것이 감격스럽기도 했고 뭐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우쭐하기도 했지만 서른하나가 되고 보니 그것도 다 시들했다. 오히려 또야? 싶어 숙취와 더불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정이 잘 얻어걸리는 비결은 무슨, 그냥 어디 모자란 애들끼리 자석처럼 들러붙는 것이고 못난 것들끼리는 그냥 얼굴만 봐도 알아보는 거였다. 세상에서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끼리 귀신같이 알아챈 거였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 구절을 두 글자로 줄이면 그냥 ‘하라’일 텐데, 수컷으로 태어나 30년 가까이 수컷으로서 제 할 몫을 못하고 살고 있었던 녀석들이나 그나마 정규직도 아닌 직장에서 업무 고과 순위로 인력 감축을 단행할 예정이니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해 월요일까지 제출하라는 팀장의 말에 별로 쓸 것이 없어, 그걸 어떻게 해서든 생각해내기는커녕 인터뷰에 대비해 옷에 쏙쏙 잘 들어가도록 살이나 빼겠답시고 보고서 작성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운동을 나온 그녀나 비슷비슷한 인간들이었으므로 비슷비슷하게 붙어먹었다,라고 그녀는 달리면서 생각한다. 그 보고서에 내가 잘하는 걸 도대체 뭘 쓸 수 있을까.

  엄마 친구 딸들이 몇 년씩 같은 남자와 성실하게 만나고 성실하게 청첩장을 보내고 성실하게 주택 청약 적금을 들 동안 그녀는 계속 똑같은 짓을 하고 또 하면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모든 주말과 모든 평일을 살이 쪘다가 그 살을 빼거나 하면서 어른이 되었다. 돈 벌고 세금 내고 엄격한 청바지의 훈련과 계도를 받으면서 줄넘기를 하고 아령을 들어 올리고 한강 다리 위를 달리면서 48킬로그램이 되면 허리에 슬림하게 피트되는 섹시한 원피스에 11센티 힐을 신고 남자를 만났고 술을 마셨고 간혹 모텔에 갔다. 그리고 다시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다음 날 하루 종일 카페인만 섭취한 후 하루나 이틀을 굶고 고수부지를 달린 다음 엄격한 청바지가 너 이제 밖에 나가도 된다, 하는 판정을 내리면 아이라인을 날렵하게 빼서 그리고 마스카라를 듬뿍 바른 다음 늘씬한 청바지를 입고 12센티 앵클부츠를 신은 다음 남자를 만났고 술을 마셨고 집에 오거나 모텔에 가거나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또다시, 또다시. 오늘처럼 54.8킬로그램이 되거나 하면 그녀는 누구에게 웃어 보일 수조차 없었다. 누구에게 웃어 보일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48킬로그램이거나 55킬로그램이거나 하는 동안 5, 6년이 훌쩍 갔다. 잘할 줄 아는 것? 팀장님, 저는 이 세상의 동정을 많이 구원했습니다. 줄넘기를 쉬지 않고 5천 개 이상 할 수 있습니다. 살이 잘 찌고 그 살을 잘 뺍니다.

  선유도 공원에서 시작해 양화대교쯤에 도달하자 운동화 끈이 헐거워졌다. 휴일답게 고수부지에는 풍선과 연을 든 아이들과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 아이들을 부르는 부모들과 시커먼 쫄바지를 입고 스포츠 고글을 쓴 채 비싼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는 아저씨들과 2인용 자전거를 빌려 타고 꺅꺅 웃는 연인들이 들끓었다. 끈을 다 매고 허리를 편 그녀는 그중에서도 2인용 자전거를 빌려 타고 꺅꺅 웃는 남녀를 유심히 바라본다. 아무리 적게 쳐줘도 체지방이 32퍼센트는 될 만한 통통한 여자 뒷자리에 타서 웃고 있는 남자가 정말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그 여자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정말로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게 지금 그녀가 가장 참을 수 없는 점이다. 보나 마나 저 둘은 자전거를 한 800미터나 될까, 타는 척이나 한 다음 즉석떡볶이니 파스타니 뭐 그런 밀가루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그녀는 흰색으로 된 음식은 죄다 피한 지 꽤 오래됐다. 설탕이니 백미니 밀가루니 뭐 그런 것들―로열 밀크티나 모카라떼 같은 걸 마시러 예쁜 카페로 갈 것이다.

  아마 저런 여자는 살면서 자본 남자가 10명이 넘지 않을 것이다. 10명은 무슨, 두세 명만 넘어도 걸레라고 생각하고 친구끼리 이야기하는 법도 없을 게 뻔하다. 물론 걸레의 ㄱ자도 품위상 입 밖에 내지 않겠지만 그녀 같은 여자를 보게 된다면 월급을 탈탈 털어 6개월 할부에 백화점 매니저 재량 할인 10퍼센트까지 졸라 샀을 sk-2 아이크림을 매일 빼놓지 않고 바르는 눈가를 아주 살짝 찌푸리며, 그 사람은 좀 쿨하고 자유롭게 살잖아요, 저는 그다지 개방적이 아니라서, 하는 말을 꼭 덧붙이면서, 쿨이라든가 자유라든가 개방이라든가 하는 단어가 원래 가진 좋은 뜻마저도 기어이 조져놓고야 말 것이다. 지금 그녀가 사무 계약직으로 다니고 있는 회사 사무실의 몇몇 여직원들이 그렇듯이. 책상을 꼭꼭 정리해놓고 헬로키티나 카카오 마스코트 인형 같은 것도 모니터 위에 올려놓고 짧으면 3년에서 길면 7년까지 쭉 사귄 남자친구가 있고 좀 진하게 그려지는 리퀴드 아이라이너 같은 건 혹시라도 싸 보일까봐 손도 대지 않으며 사무실에 도착하기만 하면 얼른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저런 걸 신느니 목을 매겠다 싶은 검은색 지우개를 썰어 만든 듯한 슬리퍼로 갈아 신는 바로 그런 여자들.

  하지만 사실 그녀도 스스로 개방적인 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술을 마시면 개방되고 만다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프리섹스주의자라거나 그런 쪽으로도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프리섹스주의자, 뭐 이런 단어를 들으면 ‘떡’에 무슨 주의가 필요하냐고 낄낄 웃었다. 자본 남자의 수 같은 건 그 수가 나이를 초과하면서부터는 별로 세는 게 의미가 없다 싶어 관뒀다. 그걸 그친 게 스물네 살 때인지 스물다섯 살 때인지 같은 것도 잊어버렸다. 그때부터 이왕 걸레 인생, 하는 식으로 자포자기해서 세는 걸 잊어버리거나 가속이 붙거나 한 건 아니고 나이는 1년에 한 번씩 먹지만 남자하고야 좀 무리하면 주 2, 3회 정도는 각기 다른 남자와 할 수 있는 거니까 남자의 숫자가 나이를 앞지르는 게 훨씬 빨랐다. 가속이 붙은 건 나이 쪽이었다. 지금도 철이 안 든 건 스물세 살 때나 마찬가지 같은데 스물네다섯 때부터 가속이 붙더니 순식간에 서른 너머까지 내달렸다. 세계 평화라든가, 민족 통일이라든가, 뭐 기타 등등 의미 있는 일은 하나도 못하고 고작 48킬로에서 55킬로까지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서, 살이 쪘다가 그 살을 뺐다가 마시고 먹거나 아예 안 마시고 안 먹거나 하면서, 남들보다 희한하게 훨씬 잘 얻어걸리는 동정이나 주워 먹으면서.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때르릉거리며 달려와 그녀는 길을 피해주고 다시 달린다. 몇 년을 늘 이렇게 달렸는데 트레드밀처럼 제자리다. 48킬로에서 55킬로까지 달려갔다가, 달려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때로는 오늘처럼 54.8킬로까지 나아가버리는 바람에 자신에게 벌을 주는 이 짓을 그리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칠지, 어디부터 고쳐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방금 사라져간 자전거를 탄 커플이 술자리에서 어떨지도 그녀는 환히 그려볼 수 있다. 통통한 여자는 맥주 한두 잔에 얼굴이 빨개진다면서 열심히 닭꼬치니 골뱅이 소면이니 같은 걸 주워 먹고, 남자는 또 먹는다고 구박하고 여자는 요즘 살이 자꾸 찐다고 애교 있게 하소연하면서 오빠 방금 또 나보고 통통하다고 했지, 나 내일부터 살 뺄 거야. 그들은 그렇게 몇 년씩 그 모든 짓을 또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있는 리그에서 저 리그로 진입할 수 있단 말인가. 양화대교에서 당산철교, 그리고 서강대교까지는 금방이었다. 이건 이렇게 금방인데 그녀는 그것만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아침도 모텔에서 잠든 남자 옆에서 옷을 슬금슬금 주워서 현관에서 갈아입은 다음 신발을 손에 들고나와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맨정신에 도대체 그 남자와 어째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일단 도망쳤다. 그녀는 사실 섹스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대실’만은 싫다. 세상의 모든 일은 거래다. 정당하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한다. 자주면 자고 가야 한다. 대실이란 ‘하고 내빼겠다’는 것이고 그건 상도덕이 결여된 행위이므로 그녀는 그런 남자들과 거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거래를 하나, 사랑을 하지 않고. 그러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서른이 넘으면 여러모로 편해질 줄 알았다. 결혼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물론 그림처럼 예쁘게 사는 친구들도 있지만 아이를 끌어안고 이혼한 친구나 선배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 바이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아마 그녀는 전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30년을 살고서도, 서른 살이나 먹고서도 피가 덜 식었나,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외로운 밤에 밖으로 기어나가 당장 누구와 어떻게든 체온을 나누지 않으면 못 견디겠을 때 거래를 해야 했다. 물론 몸을 걸고 해야 하니 그런 거래가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서 반드시 50킬로그램 이하를 유지하며 밑천을 유지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렇게 족족 동정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좀 해보라든가 저렇게 좀 해보라든가 아 좋아 그래 거기, 하는 식으로 코치를 받으면서 기술을 좀 향상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동정들은 일단 여자에게 입장했다는 사실 자체에 너무나 감격하고 한 열 번쯤 할 때까지는 그 감격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차 할 게 없었다. 그러고 한 열 번쯤 하고 나면 그들은 이제 나도 남자라는 듯 노련한 얼굴로 모텔 카운터 앞에 서서 당당하게 대실이요, 하고 말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서른이나 먹을 때까지 배운 거라곤 남자가 섹스하는 동안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잘 누워 있는 것과 그나마 가진 외모 자본을 잘 유지하는 방법뿐이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남자가 자주 바뀌는 그녀가 무슨 마성이나 강력한 도화살이라도 있는 듯 여기는 것 같지만 남자를 꼬드길 때는 그녀들의 착각만큼 별로 많은 공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술이나 좀 먹이면 되고 별로 말을 할 필요도 없다.

  ― 어머 정말요?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이 세 마디만 눈웃음을 곁들여 적당히 변주해서 써먹으면 대부분의 남자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라고 믿는다. 이게 먹히지 않는 남자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지만, 문제는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무지 이 기술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사무실 여자들은 그녀가 술을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회식 때마다 기본으로 소맥을 열 잔쯤 말아 먹어야 오늘 술 좀 마셨다고 생각하는 마케팅 담당 이사나 사장, 상무를 피하기 위해 그들 앞에 의도적으로 그녀의 자리를 세팅해놓고도 다들 전혀 미안해하는 표정이 없는 것은 분명 저 좋아하는 일 시켜주는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섹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듯 사실 술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섹스처럼,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을 뿐이다. 안주로 아무것도 안 먹으면 살이 안 찌네 어쩌네 하는 속설이 이 세상에는 한가득 있지만 그녀는 그 모든 걸 믿지 않는다. 그저 대실이 거지 같은 기분이라는 걸 알듯 자기 몸으로 체험한 것만 믿을 뿐이다. 뭐든, 먹으면 살이 찐다. 술도 마찬가지고 이게 장사 밑천을 망칠뿐더러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녀는 술을 먹지 않고 매력적으로 보일 방도 역시 도통 모르겠다. 상냥하게 웃어 보이는 다정한 태도도, 그다음에 어떻게 됐냐고, 진하지 않은 아이라인에 마스카라를 정성껏 바른 파리 다리 같은 속눈썹을 연신 깜박이며 질문을 할 수 있는 활기도, 하나도 재미없는 이야기에 발랄하게 웃을 자신도, 다 술을 좀 마셨을 때만 생겨난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완전히 사라질 때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이 단 1그램도 남지 않고 썰물처럼 말끔히 빠져나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낀다. 그리고 얼른 한두 잔 들이켜고 혈중 알코올 농도가 차오르는 바로 그 순간, 눈웃음과 상냥함과 여자로서의 매력과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역시 생생하게 느낀다. 그래서 44반 사이즈, 25사이즈 청바지 이상은 입주 허가를 받지 못하는 그녀의 옷장과 청바지 심판관과 아령과 줄넘기와 홈트 세트와 요가 매트, 체중계가 다 같이 한편이 되어 엄격하게 그녀를 밀어붙인다. 베이비, 이걸론 아직 안 돼. 조금 더 힘내. 더, 더, 더⋯⋯.

  그것들의 응원, 혹은 학대를 받으면서 선유도공원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순식간에 달려간 그녀는 흑석동을 지나고 반포동을 지나 고속터미널까지 무자비하게 나아간다. 곧 청담동에 닿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늘 아침을 포함해 잤던, 혹은 사귀었던 남자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방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 남자와 닮은 것도 같고 벤치에 앉아 어떤 여자와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콜라를 마시고 있던 남자와 닮은 것도 같다. 그 모든 남자는 그냥 내가 버린 남자, 어떻게 갖고 있을 바를 몰라서 내가 버린 남자. 그 얼굴이 이 얼굴이 되고 얘가 쟤 같고 그놈이 이놈 같고, 그들은 그냥 내가 버린 남자.

  빠르게 걷다가 달리기 시작한다. 지금 남자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다. 어제 마신 소주에 맥주에 치킨에 모둠 소시지 같은 걸 생각하면 오늘 이 정도로 해서는 어림도 없다. 그렇지, 내일도 사과 두 개만 먹고 몸을 굶겨야 체중계는 다시 그녀를 나가 놀게 해줄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다시 누군가의 팔에 안기게 해줄 것이다, 그게 누구든. 갑자기 어두워진 지 오래된 고수부지에서 누군가 옆에서 달리고 있다. 가만히 보니 한둘이 아니다.

  그녀가 아주 예전에 갖다 버린 옷들이 마라톤 대회처럼 그녀의 옆에서 말없이 펄럭거리며 함께 달리고 있다. 적당히 늘어나서 기막히게 편했던 트레이닝 팬츠, 10킬로그램 뺀 기념으로 샀던 66사이즈 원피스, 팔뚝이 프랑크 소시지처럼 보여서 매번 식칼로 살을 모조리 도려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힘들었던 레이스 블라우스, 적당한 프리 사이즈를 입다가 적당한 여자가 될까봐 이를 악물고 내쳤던 풍성한 엠파이어 라인 원피스, 하나같이 그녀가 두 번 다시 이따위 것들에 들어가서 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내다 버린 옷들. 그녀는 가장 처음으로 프리 사이즈를 던져버렸고, 마음 굳게 먹기로 결심하고 44사이즈 이상의 옷을 죄다 내쳤으며, 그다음으로 이왕 이렇게 된 거 호락호락하게 살지 않겠다며 끝내 26사이즈 이상의 청바지도 죄다 내팽개쳤다.

  내일 팀장에게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스스로 업무역량을 정성, 정량으로 어떤 경쟁력이 있는지 평가하란다. 도대체 뭘 써야 할까. 아마 이런 걸 쓸 순 없을 것이다. 팀장님, 저는 과감히 옷을 잘 버립니다, 살을 빼기로 결심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끈덕지게 오래 굶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뺀 살을 모두 합치면 300킬로그램은 될 겁니다, 술만 마시면 매력적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임의로 수명을 늘릴 수가 있습니다.

  이 옷들을 죄다 버린 대가로 그녀가 얻은 것은 몇 년간 늘어난 수명이고 그 수명만큼 그녀는 48킬로에서 55킬로까지 달려갔다 돌아오는 것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할 것이다. 해는 완전히 지고,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도 2인용 자전거를 탄 연인들도 모두 불이 환히 켜진 집으로 돌아가고, 그녀는 속도를 내어 옆에서 같이 달리던 옷들을 마침내 뿌리치고 더 빨리 달려간다. 옷들이 끝내 뒤떨어져 잔디밭 저쪽에서, 매점 뒤쪽에서, 축구 골대 한편에서, 29사이즈 스트레치 청바지나 허리에서 엉덩이까지 넉넉히 덮는 헐렁하고 편안한 후드 티셔츠나 색깔은 곱지만 트라페즈 실루엣의 펑퍼짐한 원피스 따위가 이쪽을 돌아보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본다. 그것들은 어쩐지 서글퍼 보이지만 멈출 도리가 없어서, 그녀는 더 무자비하게 달린다.

  그렇게 보지 마, 이제 너희들하고는 안 놀아, 그렇게 보지 마.

  그 처연한 꼴이 보기 싫어서 그녀는 더 빨리 달리고 헐렁한 원피스와 여유 있는 크기의 티셔츠와 통이 넓은 청바지가 서글프게 펄럭이며 배웅한다. 어찌나 맹렬하게 달렸는지 고속터미널을 지나 저만치 올림픽경기장이 보인다. 그렇지만 어제 그제 섭취한 칼로리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그녀가 잘하는 건 이런 것뿐이다. 더, 더, 더. 경국지색은 타고날지 몰라도 경구지색은 제 할 나름이다. 공산품처럼 이런 식으로, 경구지색은 어떻게든, 어찌어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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