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무한의 건축

흔히 글을 쓰는 일은 건축과 닮아 있다고들 말한다. 알맞은 자리에 적확한 어휘를 찾아 넣어야 하며, 문장과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매만지고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글은 영겁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영원하고도 무한한 공간이 된다. 여간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보수 공사가 필요 없다. 시간과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찾아 읽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반긴다.
그런 의미에서 이은선 소설가의 본 탐방기는 더욱 흥미롭다. 작가들이 글을 써 내려갔던 지역 혹은 문학관이 된 장소를 찾아가 취재하고 추억하며 그 자리에서 새로이 문장을 세우고 쌓아 올린다. 앞선 작가들의 건축물과 자취를 해치거나 지우지 않으면서 오롯이 자신의 감상과 일화를 건축하여 보인다. 이때 저 기존의 유서 깊은 문학의 축조와 골조들은 도리어 후대의 작가와 문장들을 불러오는 좋은 부자재가 된다. 이를 보면 문학의 지평은 미지의 공간을 발굴해낸다기보다 증식되는 것에 가까운 듯하다. 작법서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하자면, 문장은 언제나 다음 문장을 불러온다.
탐방기에서 언급되는 장소 중에는 공교롭게도 이미 가본 곳들도 꽤 있었다. 봉평의 이효석문학촌이나 종로 청운동의 윤동주문학관, 제주 4·3 평화기념관이나 전주의 최명희문학관은 언젠가 방문했던 장면이 필름 사진처럼 마음 한 곳에 선명히 남아 있다. 작가와는 다르게 애당초 목적지가 이곳들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들르게 되었고 팻말이나 이정표를 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러야만 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중에서도 이효석문학촌은 나 역시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는 과연 작가 이효석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하는 물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고 만 곳일 테다. 이효석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이 또한 작가와 마찬가지로 한컴 타자 연습을 통해 「메밀꽃 필 무렵」을 열심히 ‘필타’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에는 어떤 내용인지 모르면서도 “달이 뜨렷다”라는 문장이 나오면 나 자신도 모르게 짐짓 중후한 목소리를 내며, 속엣말을 꺼내놓듯 따라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산허리가 온통 메밀밭이어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문장까지 보고 나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봉평이라는 지역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싶다.
내친김에 여행기를 조금 더 풀어본다. 대학생이던 때, 친구와 갑작스럽게 떠난 전주 여행에서 한옥 마을은 빠질 수 없는 코스였다. 한 학기 동안 과장을 보태어 지칠 정도로 읽고 썼으니 좀 쉬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향한 곳이 왜 하필 전주였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다. 길게 늘어선 한옥집과 관광지 특성답게 여기저기 세워진 먹거리 노점들은 부자연스럽게만 다가왔고, 어쩐지 뻔히 예상됐던 풍경이었는데도 출발 당시의 들뜬 마음과는 달리 어느 것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관광객이라기보다 미아가 된 마음으로 걷다가 친구와 들어서게 된 곳이 바로 최명희문학관이었다. 최명희 작가의 친필 원고와 엽서, 인터뷰가 담긴 패널들이 있는 전시를 본 뒤에 나와 친구가 말없이 한 일은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엽서 쓰기 테이블에 앉는 것이었다. 엽서 쓰기를 다 끝내고 나서야 우리는 별 수 없이 문예창작과 학생인가보다며, 몸이 읽고 쓰는 일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고 나서야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한옥마을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때 쓴 엽서를 읽으면,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도 그날의 한옥마을 거리가, 전주 시내의 갓길에서 맡았던 풀 내음까지도 활자 하나하나가 구체적인 이미지와 감각을 획득해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다.
작가의 탐방기에 실려있는 사진이나 메모를 보며, 내게도 그때의 방문이 몇몇 장면들과 기록들로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의 가이드를 따라 뒤를 좇으니,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방문한 적이 없는 문학관이나 도시조차 구체적인 이미지로 선연하게 내 눈앞에 그려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동행을 끝내고 이 책을 덮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미 작품을 통해 접한 적 있는 작품 속 배경과 실제의 지명과 장소들과 인물들의 목소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일상 곳곳에 깃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음 놓고 여행을 가기 쉽지 않은 작금의 시대에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때에는 여행기와 같은 책 속의 공간만큼 안심하고 떠날 수 있는 데가 없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민음사,2012)에서 열여덟 살부터 서른 살까지 굉장히 많은 소설을 읽었으며, 그때 읽었던 소설이 자신에게 우주를 선사해주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우주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못지않게 인생의 모든 면을 세세히 알려 주었고, 나의 삶 못지않게 인간적이었으며, 오로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심오하고 포괄적인 바람, 위로 그리고 약속들로 가득 차 있었”노라고. 그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다고.
편의상 이 책을 탐방기라고 일컫기는 했으나 다시금 들리고 싶은 장소를 찾아 떠나고자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나는 오르한 파묵의 말을 떠올리며 이 책이 오히려 하나의 소설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만약 이 책이 탐방에만 목적이 있었더라면 보다 더 많은 사진들이 있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순천에 있는 김승옥문학관에서 있었던 일화가 그러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말하기가 쉽지 않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손말로 순천 곳곳을 안내해주는 김승옥 작가의 손끝에서 길게 돋아난 갈대숲의 정경은 실제로 보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아릿해지는 면이 있었다. 그의 「2020년, Dπ9 기자의 어느 날」이라는 소설이 발표된 지 벌써 50주년, 표제의 시간으로부터도 2년이 지나 후배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을 오마주 형식으로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대담을 엿들으며 그 긴 세월의 설명이 충분치 않아도 어쩐지 경이롭고 먹먹해지는 것도 그랬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본 책의 제안을 받고 첫 번째 취재를 가기 전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대목을 따라 읽으며, 무사히 첫 취재를 마치고 순천에 들렀을 때 김승옥 작가가 그녀의 소식을 알고 손말이 아닌, “좋다”라고 크고도 단단한 발음으로 축하해주었다는 장면은 나에게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오르한 파묵에 의하면,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간다. 문학사가 이루어 놓은 지형도를 살피어 좇는 작가의 문장들을 쫓아 읽으며, 누군가를 무진으로 초대하는 일은 한 세계가 다른 세계에 도착하는 시간이라는 작가의 말마따나 나 역시 그녀의 문장들로 새로운 시공간을 부여받은 느낌을 받았다.
본고를 쓰는 중에 우연히 이런 글을 보았다. 정확히는 문과와 이과를 대립시키며 사뭇 진지한 농담을 주고받는 글이었는데 그 밑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문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그 세상을 바꿀지도 모를 사람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고. 작가는 이 책에 모인 글의 힘 팔할은 작가들의 문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면서, 탐방하는 동안 소설이 어떻게 마을 하나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하여 감탄한다. 하여 “소설 한 편이, 책 한 권이, 한 작가가 현재의 마을을 세워 둔 게 아닌가”하는 작가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설 속 세계가 현실로 실현될 때,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긍심을 느끼고 그 자긍심은 우리와 세계를 바꾸어놓는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며 조금씩 미뤄오던 국내 여행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그 끝에는 머지않아 해외 여행을 안심하고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언제나 따라 붙는다. 조만간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이스탄불에 가서 오르한 파묵이 동일한 이름의 소설 『순수 박물관』을 집필할 때부터 개관을 생각했다던, 순수 박물관을 꼭 방문하리라. 누군가의 문장이 동일한 선상에서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축조해낼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