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상흔의 계량 (불)가능성과 치유 가능성

김명희·김석웅·김종곤·김형주·유해정·유제헌·이재인·진영은, 『5·18 다시 쓰기』, 오월의봄, 2022.

    이 책의 여러 생애사 기술을 근거로 한, 가상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1980년 5월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갑’은 시민군으로 합류한 직장동료가 계엄군에 폭행당하며 끌려가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고, 이후 유가족을 대신하여 고문으로 훼손된 동료의 시신을 수습했다. 십수 년 넘게 그는 5·18 관련 보도나 영상을 접할 때마다 폭음했다. 잔혹한 린치 현장과 고문당한 시신을 목격한 충격, 동료를 돕기 위해 나서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 학살자들에 대한 강렬한 분노 때문에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그의 아들 ‘을’은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과 분노조절장애로 인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상시적인 가정폭력의 두려움 속에서 보냈다고 회상하며, 지금도 5·18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민주’나 ‘항쟁’보다 성장 과정에 겪은 가정의 불화부터 먼저 연상되어 우울감에 시달린다.
    과거청산은 공권력에 의해 행해진 부정의를 처벌하고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며, 상흔을 애도하고 치유하여 왜곡 없이 기억되게 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으로 규정된다. 이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배상, 기념 및 역사 부정 규제를 목적으로 한 사법적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법을 통한 과거청산 과정은 위의 ‘갑’과 ‘을’의 상흔에 가 닿지 못한다, 이들은 사망자도, 부상자도, 행방불명자도, 유족도 아니어서 법률상 피해자의 범주에 포섭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고통은 ‘군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관계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아닌가? 경상국립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에서 기획한 『5·18 다시 쓰기』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을 둔 공동연구의 결실로 보인다.
    금전적인 배·보상 중심의 법적 과거청산은 피해 사실을 증명하고 피해 크기를 계량할 증거와 증언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인적·신체적·경제적 손실이라는 결과적 측면에서 피해가 규정됨으로써 ‘중대한 인권침해’로 인한 정신적·사회문화적·정치적 피해의 고유한 특성과 다양한 양상은 피해사실로서 인정되지 못”(25쪽)함을 저자들은 지적한다. 사회적 상흔은 단지 당사자와 가족뿐 아니라 무차별 살상을 목격하고 가두방송이나 유언비어를 청취함으로써 공포와 무력감, 죄책감, 집단적 오명의 상징폭력 등을 겪은 사회적 구성원 사이에 중층적이고 동심원적으로 걸쳐 있다. 저자들은 배·보상 프레임으로는 오롯이 포착되지 않는 이러한 피해자들을 범주화하고, 구술사적 방법으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분석하고자 했다.
    책에서 규정한 5·18 집단트라우마 피해자 범주는 ①직접적 피해자, ②유가족 1세대 및 2세대, ③일선대응인(의료인, 공무원, 성직자, 시신수습자, 언론인 등), ④목격자(참여적 목격자, 우연적 목격자, 현장 거주자), ⑤지역사회 일원, ⑥사후노출자이다. 간첩 오명으로 인한 사회적 고립과 유가족 내부의 의견대립 때문에 가족원의 상실을 제때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경우나, 대학 진학에 가산점을 받은 유공자 자녀가 “우리 아빠는 5·18 때 뭐 했나 몰라”라는 말을 동년배에게 듣고 상처받은 경우, 공적 과거청산 담론 안에선 ‘의인’이지만 막상 본인에겐 부상당한 군인과 쫓기는 시민군 양편 모두를 은닉하는 과정에서 겪은 이중적 위협이 상흔으로 각인된 경우 등, 이 책은 5·18 관련 법제가 규정한 직접적·물리적 폭력의 피해자 범주 바깥의 존재들을 세심히 조명한다. 특히 학살의 진실을 뒤늦게 접한 후 이를 대중에게 알리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사’들을 5·18의 ‘사후노출자’로 묶어내고, 사후노출자들의 외상 경험을 단지 외상적 물질의 잔혹함에서 찾기보다는 생애 경로와 연관 지어 분석해낸 부분(「진실을 전달하고 부정의에 맞서 싸우다」)은 역사적 상흔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포스트 트라우마를 논의함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지점을 짚어낸다.
    저자들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개념에 입각한 의료 모델을 넘어서 5·18 피해의 집단성과 복합성을 한층 세밀하게 포착해낼 진단 방식으로서 ‘복합적 집단트라우마’(CCT) 개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누적·재생산된 사회적 트라우마의 고유한 성격을 밝히기 위해 고안된 진단기준임을 강조한다. 의학적 트라우마 개념이 국가폭력으로 인한 피해의 상호주관적 구성이나 연속성을 설명해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저자들이 제시한 이 개념을 ‘새롭게’ 사용할 때 기존 국가폭력 트라우마 연구들이 미처 짚어내지 못한 어떤 지점이 드러날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좀 더 자세히 설명되고 사례 분석 과정에서도 구체적으로 밝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피해자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저술 목적과 관련해서도 그것이 무엇에 대한 어떠한 ‘다시 쓰기’인지가 명료하게 답해지지 않은 듯하다. 5·18에 대한 법적 성격이 일차적으로 헌정질서 파괴죄로 규정되어 있다 하여 5·18 관련 법제화 과정에 인권법적 고려 자체가 배제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5·18 민간인 학살에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 제7조에 정의된 ‘반인도적 범죄’에 적용될지는 그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검토되어왔으며, 국제인권법의 법리로 국가폭력 피해를 분석한 선행연구들 또한 존재한다. 아울러 저자들은 ‘인권 기반 5·18 트라우마 진단 지표’(54〜55쪽)에서 ① 시민·정치적 권리 및 평등권, ②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③ 인권침해 피해자의 권리를 각각 나누어 범주화하였는데, 여기서 ‘인권침해 피해자의 권리’를 ①과 ②로부터 분리하여 규정한 근거가 무엇인지 다소 의문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의 고유한 기여는 인권 기반 접근을 한 데에 있다기보단 배·보상 중심의 과거청산에서 계량되지 못했던 피해와 상처에 주목하고 포스트 트라우마의 지속성을 밝힘으로써 지금 여기, 이들에게‘도’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 데에 있을 듯하다. 저자들이 행한 것은 말하자면 ‘다시 쓰기’라기보다 세심하고 두터운 ‘이어 쓰기’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그 첫 결실이라면 다음 ‘이어 쓰기’를 독자로서, 그리고 법을 통한 과거청산을 공부하는 연구자로서, 기대하며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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