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십시오.” 전하십시오.

이용훈, 『근무일지』, 창비, 2022

  시인의 말 “살아가십시오.”에서 시작하고 싶다.1 이 말이 감싸고 있는 이야기는 과연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일까? “근무일지”로 대표되는 시집 속 이야기들 말이다. 그 이야기들은 단지 삶,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노동’이라는 이름의 ‘수단’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노동의 현장에 대한 증언 형태의 목소리가 페이지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시간 또한 그 계량적 차원만을 고려한다면 삶을 이루는 시간에 다름 아닐 수 있겠으나, 화자의 증언을 통해 비어져나오는 노동의 시간이 온통 잿빛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유념해서 읽어야 한다. 그 시간을 두고 “살아가”는 일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마땅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삶을 둘러싼 여러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한 존재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의 일부를 그가 바라고 기뻐하는 방식으로 마름질해 이어 붙이는 일을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적어도 내가 정의하는 ‘살아감’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주의적 시간의 바깥을 상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 사회에서 자본의 톱니를 굴리는 데 쓰이는 자기 추출의 시간과 각 개별자를 위해 쓰이는 자기 축적의 시간은 잘 구분되지 않으며,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의 차이 또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기 축적을 위한 여가 시간은 자기 추출을 위한 노동 시간의 비료로 쓰이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가 노동의 종속적이고 보조적인 것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저마다의 밤을 발견하고 조직하는 것, 노동 시간 안에서마저도 ‘노동’의 의미와 장소와 시간을 다르게 배치하고 정치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라는 구조적 오류 안에 놓인 노동하는 몸들의 소명 중 하나일지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시집 속 이야기는 ‘살아가는’ 일이 아닌 ‘살아내는’ 일에 가깝다. 위험과 고독과 멸시와 냉기가 우글거리는 시간 노동 위에서 외줄을 타는 한 사람의 얼굴. 그 얼굴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놓인 시간과 장소를 버티는 얼굴이며, 수시로 뒤를 돌아보면서도 뚜껑이 열린 거대한 맨홀 쪽으로 조금씩 떠밀리는 얼굴이다. 얼굴의 이유는 단 하나다. 살기 위해서다. 자기 존속을 위한 의지 때문이다. 여기서 자기 축적의 시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기 추출의 시간에 복무할 가능성을 끝없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자기 축적의 시간마저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에서 이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핍진하다. 시집 속 이야기가 ‘증언’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앞서 평했던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산재로 매년 2,000여 명이 사망하고, OECD 국가 중 수십 년째 산재 사망률 1위를 기록하며 ‘산재공화국’의 명맥을 지속시키는 사회다.2 아침에 눈을 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쁘게 채비하고 밥벌이를 위해, 즉 살기 위해 일을 하러 갔다가 한순간 죽는, 그런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보다 더 거짓말 같은 일은, 그 죽음들이 매일 일어나고 매일 잊히며 매일 다시금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살아내는’ 일이 아니라 ‘살아남는’ 일이 매일같이 숙제로 던져지는 사회인 것이다.
  

  옅어지는 빛 흔들리는 빛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빛에서 검은 물체가 끝없이 넘쳐흘러 두텁고 매끈한 촉수가 숨통을 파고든다 벽이 조금 갈라졌다 틈 사이로 목소리를 들린다 낮게 아주 여리게 읊조린다 내려가다보면 올라올 수 없거나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저 아래 흩어져 있는데 한발 내디디면 지하에서 그 아래 주차장에서 사람들은 올라오는데

─「한낮의 순찰자」 중에서
  

 &nbsp위험과 고독과 멸시와 냉기의 시간을 견디면서도 살아내려 했고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은 “올라올 수 없거나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 “저 아래”에 방치되고 만다. 방치된다는 건 잊힌다는 의미다. 위 시의 화자만큼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잊지 않고 듣고 또 “읊조”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위험의 현장 속으로 제 발로 다시 걸어 들어가,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나는 뼈대를 드러내겠지만 나는 붕괴될 거지만 반복되는 일이겠지만”(「다비茶毘」), “나는 스스로 걸어 들어온 거 맞아 되는대로 지껄여 어느 누구도 나를 떠밀지 않았어”(「다비茶毘」). 이 사회는 이렇듯 한 노동자가, 착취와 위험으로 가득 찬 현장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할 ‘자유’를 준다.
  그렇다면 시집의 말미에 놓인 시인의 말은 왜 “살아가십시오.”가 되었을까. 살아가는 일이 아니라 살아내거나 살아남는 일을 말하고, 그 일이 이 얼마나 많은 아이러니와 고통과 치욕을 통과해야 하는 일인지를 말하는 시집과 충돌하거나 불화하는 듯 보이는 말이 왜 거기에 놓였을까.
  시적 화자가 이 땅 위의 노동자로 대표된다고 할 때, 그는 동시에 쓰는 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의 곁에서 노동하는 많은 몸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풀어서 증언하는 자. 말하자면 그는, 노동과 생명을 추출하기 위한 자본 체제의 치밀한 촉수가 도처에 뻗어 있는 이 어둠의 사회에서, 목소리라는 빛을 전하는 자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이 체제의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흡혈로부터 탈주하는 존재가 된다. 밤을 개발하고 밤의 목소리를 받아 적는 사람이 된다. 노동의 장소를 예술과 정치의 장소로 새롭게 구성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살아가십시오”라는 말은 시집 속에 있는 낱낱의 이야기에는 반하는 표현인 동시에, 시집의 뉘앙스를 거울처럼 되비추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품은 ‘증언’이라는 형태와, 현장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자리에 있는 시적 화자의 위치가 이를 담보한다. 청원 형식의 문장인 “살아가십시오”에 귀를 바짝 대면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쓰십시오. 증언하십시오. 당신의 이야기와 당신 이웃의 이야기를 멀리, 더 멀리까지 전하십시오. 더 크게 울고 더 오래 함께이십시오. 거리에서, 광장에서, 문학의 안팎에서 다음의 장면을 상상하고 겪으십시오. 사방에서 우글우글 모여든 숱한 귀들. 어눌하고 흔들리고 미미하다가 여럿이 된 뒤로는 그 무엇보다 정확한 것이 된 목소리들. 체온을 품은 채로 늦지 않게 길을 비켜주고, 부드러운 바리케이트를 만들어주는 들쭉날쭉한 공동의 어깨들.

  1. 한 편의 시가 아니라 한 권의 시집이 우리 앞에 주어졌을 때 그 한 권은 낱낱의 시의 묶음 다발이 아닌 하나의 결정(結晶), 즉 1편의 시로 읽힐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시인의 말」 역시 그 ‘1편의 시’ 안에 속하는 말이라고 본다.
  2. 권미정·림보·희음, 『김용균, 김용균들』, 오월의봄, 2021. ; 김기홍, 《한겨레》, 「왜냐면: 산재사망 23살 선호와 그 아버지를 처음 만나던 날」, 2022. 5. 12.(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994866.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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