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달빛 추억 ─ 스물두 살 탈북 여성 최사랑

  

<인터뷰어 주>
  최사랑(가명)은 스물두 여성으로 2014년 입남入南하여 현재 서울 소재 C대학교 유아교육과에 재학 중이다. 고향은 북한 량강도이며, 가족은 물론 가까운 친족 모두가 입남하여 살고 있다. 마포에서 그녀는 이종사촌 소유의 임대 주택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그런데 곧 집을 비워줘야 해서 부득이하게 이사를 가야 할 처지에 놓였다. 개인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사랑은 긍정적인 면이 있어, ‘서울 마포 도심에서 운 좋게 홀로 지내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또한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이 지속되어 학교까지 가는 이동 시간을 줄여주고 생활비도 절약할 수가 있어서 되레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했다. 한글날 대체공휴일에 그녀와 나는 마포에 위치한 내 작업실에서 만났다. 긴 이야기를 나눈 후 주변 분식집에 들러 김밥과 어묵을 먹고 부근 도서관 1층에서 커피도 마셨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최사랑과 하루종일 이야기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해줄 말이 많다고 했으며, 언제든 연락해도 좋다고 했다. 끊임없이 쏟아낼 그녀의 고향 이야기가 앞으로도 기대된다.

  

  ─ 고향에서 학교 다녔을 때 얘기 좀 해줄래요? 어떤 식으로 지냈는지, 뭐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게 있었는지. 고등학교든 중학교든 다 좋아요.

  저희는 (교실)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거든요. 저희는 그 초 있잖아요, 그거로 닦았어요. 초를 이렇게 바른 다음에(손으로 모양새를 취함), 이거 하면은 엄청 빤딱, 저희는 락스가 없으니까. 촛불 키는(켜는) 초로 이렇게 해가지고 닦으면은 바닥이 엄청 반짝하거든요. 나무였어가지고, 그래가지고 나무 사이에 먼지도 엄청 많고. 맨날 그것 때문에 당번을 정해가지고 이거 하고 가고 그랬었거든요. 애들이 돌아가면서 닦는 거죠.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해가지고, 줄이 이렇게 있으면 여기 두 줄은 내 거, 이렇게 두 줄은 니 거 그랬어요. 자기 줄이 쭈─욱 있어요. 그래서 이걸 닦고 가고 해야 하는데, 근데 그게 초를 (칠)하면 바닥에 막 묻고 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하라고 하니까 했었거든요.
  근데 여기(남한)서 학교 가니까 그냥 바닥인 거에요. 콘크리트 바닥인 거에요. 그래가지고 ‘우와 이렇게 하면 청소하기 진짜 쉽겠다’고 혼자 생각했었거든요. 그리고 여기는 학교 학생들이 청소를 많이 안 하잖아요. 당번이 바닥만 쓸고. 이런 간단한 것만 하는데 우리는 청소를 다 우리가 하고 많이 했었으니까. 여기는 청소를 따로 해주시는 분이 있지 않아요? 저희가 어느 정도 해도, 기본적인 건 우리가 해도 웬만한 건 다 해주시잖아요. 근데 우리는 정말 다 그런 게, 그런 개념이 없으니까 우리가 다 해야 하니까. 우리는 바닥 닦고 창문 닦고, 공부 말고 일하는 게 더 많죠. 그리고 끝나면 또 밖에 그 코스모스 심으러 가고 그래요. 수업 끝나고 길에 코스모스를 많이 심거든요.
  북한에서는 코스모스를 학생들이 그 시기가 되면 가서 심는 거예요. 그거를 다 저희가 심는 거예요.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를 그렇게 치열하게 하기보다 가서 놀고 그런 거하고 이런 게 더 큰 것 같아요.

  ─ 이곳 남한에 오니까 조용하다 싶었겠군요?

  그쵸. 근데 제가 북한에서 온 걸 얘기하고 학교에 갔잖아요. 그니까 저는 중학생들에게 큰 이슈가 됐던 거예요. 북한 사람을 걔네는 처음 보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 애들이 말도 많이 걸어주고. 뭐 “어떻게 왔어?” 이런 식으로.
  근데 제가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갔는데 저희 옆집에 저랑 동갑인 한국 애가, 2학년에 다니는 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학교에서 좀 잘나갔었나 봐요. 여기서는 열네 살이면 중학교 1학년이잖아요. 나는 열다섯 살이니까 원래 2학년이어야 하는데 1학년이었으니까. 학년은 낮은데 나이로는 걔랑 친구였으니까. 걔가 옆집에 사니까 몇 번 보고 조금 친해졌죠. 그래가지고 그 친구가 내려오고 했었거든요. 저는 1층에 있고 그 친구는 2층에 있고 하니까. 그리고 그 친구가 다른 애들한테 ‘잘 봐줘라’ 그랬거든요. 학교에서 잘나가는 친구니까. 그렇게 해줬었는데, 그러니까 애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잘나가는 선배랑 나는 동갑이니까. 나는 애들한테 “야”라고 했지만 걔네는 “언니”, “선배”라고 했어요. 제가 한 살 많다는 것을 알아가지고. 근데 저는 그냥 이름 불러도 상관없다 했었거든요.
  그래가지고 애들이 처음에는 관심을 가져줬었거든요. 근데 그 관심이라는 게 오래가지는 안잖아요. 처음에만 딱 관심을 가질 정도였고, 그리고 어떤 친구는 자기 집에 초대를 한 거예요. 근데 그때는 그냥 갔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 부모님한테도 소개시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제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북한에서 왔다니까 궁금해하셔서 데려간 건 아닐까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 집에 갔다 와서 제가 더 친하게 지낸 건 아니거든요. 그 뒤로 더 친하게 지냈던 것도 아니니깐 그렇게 생각을 했었고.
  근데 저는 애들이 하는 대화 같은 거 있잖아요. 아마 저희가 지금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하는 대화에 한국 사람도 사십 대 사람이 끼면 그 대화를 못 따라갈 거예요. 저는 나이는 같지만 또 살아온 그게 다르니깐 같은 한국말이라도 얘들이 하는 대화는 다르니깐 못 따라가거든요. 그러니깐 뭔가 소외가 되는 거예요.

  ─ 못 따라가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를 들면 ‘에스파’라는 새로운 걸그룹이 나왔잖아요. “야, 이번에 뮤비 봤냐? 윈터 파트 개쩐다.”그러는데, 저는 ‘에스파’가 뭔지, 뮤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니깐 그냥 가만히 앉아서 혼자 ‘에스파? 뮤비? 뭐지?’ 하며 가만히 듣고 있으니깐 대화에 껴야 관계가 형성되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 있고 대충 따라다녔었는데. 또 체육 시간에 친구한테 무슨 말을 했다는 거예요. 생각이 안 나거든요. 안 좋게 말했다는데, 내가 안 좋게 말할 이유도 없고 그 친구와 친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말도 많이 안 했었는데 뭐라 했대요. 근데 그게 기분이 나빴다구, 다른 친구들도 나랑 못 놀게 한 거예요, 그 친구가.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생이라면 그냥 혼자 다니고 말지 하겠는데 그때는 그게 아니지 않나요? 혼자 다닌다는 거 엄청 큰 거잖아요. 중학교 1학년생이 혼자 다닌다는 게, 혼자 급식실을 못 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안 가고, 밥도 계속 굶고, 그러다 엄마한테 얘기했고. 엄마한테는 이게 너무 가슴 아픈 일이잖아요. 그렇게 다니다가 자퇴를 하고. ○○학교에 가서 그냥 검정고시를 보고 나오니깐 딱 고등학교 1학년 그 나이더라구요. 그때는 1년 반 흐른 뒤였나? 그러니깐 어느 정도 한국 문화에 대해 공부 많이 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갔거든요.

  ─ 중·고등학교 때가 굉장히 예민한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지고, 두세 달 정도 하나원에서 있다가 나왔으니 문화 쇼크를 경험한 거네요?

  그렇죠. 거기(북한)서는 친구 걱정, 정말 ‘왕따’라는 개념조차, 친구가 없다는 개념조차 없고, 한 동네에서 살았고. 있어봤자 무리가 다를 뿐이고. 니네 무리, 우리 무리가 있어서 다 같이 친한 분위기거든요. 다만 동네가 있는데, 송봉동 패, 위원동 패 이런 거 있었고 또 다 같이 누구 반에 모여가지고 한국 노래 틀고 춤추며 놀고. 걸리면 안 되지만 다 그렇게 놀아가지구 왕따라는 개념이 없죠. 당연히 없죠. 정말 막 찌그러져가는 집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무시하지 않고 다 친구이고. 여기서는 회장을 그 친구의 실력이나 이런 거 보고 뽑지만 거기서는 돈으로 뽑거든요. 돈이 많으면 그런 걸 하거든요. 그니깐 돈이 많으면 그렇게 되는 건 사실이에요. 또 그런 애들은 돈이 많으니깐 사교육도 많이 시켜 공부도 잘해요. 궁극적인 건 돈이에요. 거기서는 교사들이 먹고사는 건 월급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주는 돈이에요. 그렇게 먹고살아요.
  근데 여기는 회장, 부회장밖에 없지만 북한에는 분단위원장, 학급반장, 사상부위원장 뭐 아무튼 되게 많아요. 거의 9~10명을 만들어놓고 그 부모님들이 주는 돈을 교사들이 받는 거예요. 돈도 갖다주고 쌀도 갖다주고 기름 같은 것도 갖다주고. 교사들이 어떻게 살겠어요. 월급 같은 거 안 나오니 그게 당연한 거예요. 윤리를 따지면 교사들이 못 사니깐, 그게 일종의 월급인 거죠.

  ─ 남한에서는 학생들이 죽어라 공부만 하는데, 북한은 통제된 사회라 오히려 학교 안에서는 애들이 즐거워하는 거네요?

  학교를 졸업하면서 학생들이 경비를 서야 하는데, 나올 수 있는 애들만 나와요. 재밌어서 많이 나가요. 남자애들은 밤에 밭에 가서 감자나 이런 걸 훔쳐가지구 오고. 경비 서는데 그냥 노는 거예요. 감자, 호박, 옥수수 이런 걸 밭에 올라가서 훔쳐가지구. 걸리면 주인한테 겁나 욕 먹고. (웃음) 훔쳐서 학교 마당에서 불 지펴 구워 먹고 손전등 가지고 한 세 번 정도 학교 안을 순찰하는 거죠. 순찰한다지만 그냥 노는 거죠.
  불 다 꺼진 학교에서 노는 거 되게 재밌거든요. 근데 불이 다 꺼진 학교가 정말 무서워요. 그렇게 어둡지 않은 이유가 북한은 왠지 모르겠는데 달이 엄청 밝아서 학교 텅 빈 곳에도 달빛이 엄청 들어와요. 그래서 막 그렇게 암흑 같진 않아요. 달빛이 많이 들어와가지고. 또 저희 학교가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전 여기서 달빛을 그렇게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북한에서는 이렇게 가면 정말 밝고 큰 달이 막 걸어가면서 계속 따라오거든요. 그래서 막 ‘달이 나를 따라온다’ 이렇게 볼 정도로 진짜 크고 밝은 달이.
  우리 집에서 ○○(친구 이름) 집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데, 거기 걸어갈 때도 밤인데, 거긴 가로등 같은 게 없잖아요. 오직 불은 그 저녁에 달빛밖에 없어요. 저희는 손전등 필요 없이도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막 걸어갈 수 있어요. 가로등이라는 게 아마 평양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평양도 아마 보여주기식으로 외국인들 올 때만 하고 많이 없죠. 아니 가정집에서도 못하는 걸 거리에 있다는 거는 누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였죠. 저희한테는.

  ─ 그러면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스위치가 가정집에도 많이 없어요?

  스위치요? 제가 생각이 안 나는데 없어요. (스위치를 가리키며) 이런 게 없어요. 냉장고가 있어서 있기는 한데, 저희 아파트에 거의 몇십 명 사는데 제가 북한에서 냉장고를 본 건 딱 한 집이었거든요. 음식이 별거 있나요. 밥 한 끼 해 가지고 한 끼 먹고, 매끼 해서 먹는 거니까 딱히 냉장고가 필요 없죠. 반찬 같은 거, 나물 같은 거 그냥 매끼 해서 먹는 거예요. 오래 보관했다가 먹고 이런 게 아니에요. 겨울에는 조금 추우니까 둘 수 있겠지만 여름에는 다 그렇게 해서 먹죠. 난방은 불 때죠. 불 때서 온돌로 사는 거죠. 겨울에는 그걸 때요, 추우니까 그 연탄을 계속하니까. 그리고 불이 없으니까 야간 자율학습 없고, 밤이 되면 집에 가고. 저희는 도시락 먹고 가니까 3시쯤엔 아마 다 갈 걸요. 3~4시쯤엔. 진짜 최소 5시 안에는 다 집에 갈 거예요.

  ─ 그러면은 선생님들은 수업 준비를 어떻게 하는 거에요? 컴퓨터로 수업 준비를 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러게요? 모르겠어요. 그걸 전 안 겪어봐서요. 아, 교과서 같은 건 있어요. 프린트 같은 건 안 나눠 주죠. 정말 당연히 안 나눠줘요. 교과서로 해결보는데 그것도 새 게 아니고 누가 쓰던 거 받아가지고 물려주고 이런 개념이거든요.
  근데 이게 너무 웃긴 게 북한 애들은 다 정말 공감하는데 우리는 분필을 그 학교에서 임원을 맡고 있는 애들이거나 학교 학생들이 돈을 모아서 사는 거예요. 학생들이 분필을 다 사야 하거든요. 근데 분필이 떨어지면 다른 반에 가서 분필을 동냥해 와야 해요. 그걸 대부분 학교에서 임원을 맡고 있는 애들이 가거든요. 그러면은 그 적막한 공기 속에 조용하잖아요. 이렇게 수업할 때 문을 두드리면 수업하던 애들이 다 나를 봐요. 그러면 “선생님, 분필 하나만 주세요.” 하면 “아, 우리도 없어.” 하는 선생님들이 많거든요. 그러면 “죄송합니다.” 이러고 또 다른 반 가서 그거를 빌릴 수 있을 때까지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걸 여기서는 상상도 할 수 없잖아요.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애들이 진짜 많이 와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애들이 5명 있거든요. 제가 며칠 전에 만났었거든요. 그래가지고 그 분필 얘기를 막 하는데, “야, 너 그때 우리 반에 수업하고 있는데 빌리러 왔었잖아.” 막 이런 얘기하고 놀았어요. 또 우리는 학교 안 나오는 친구 있으면 집에 데리러 가야 돼요. “누구 누구 집에 데리러 갈 사람?” 하면은 애들이 “저요, 저요.” 이렇게 하고 저희는 데려오려고 가는 게 아니에요. 저희는 가서 놀려고 가는 거지. 그래서 가서 옷 갈아 입고 밥 먹고 친구랑 카드게임 하다가 이때쯤엔 가야겠다 싶을 때 슬슬 나와가지고 학교 가서 “누가 아프대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끝날 시간 맞춰 가거든요.
  그때 애들이랑 달빛을 받았다는 게 굉장히 좋은 느낌이에요. 그때는 못 느꼈는데 그 밤하늘이 정말 이쁘거든요. 달뿐만이 아니라 여기서는 별을 셀 수가 있는데 저희는 별을 센다는 거는 정말 상상도 못할, 별이 정말 밤하늘을 꽉 막고 있었거든요. 별이 그냥 밤하늘에 쫙 깔려 있어요. 달이랑 별이 쫙 깔려있어요. 그걸 보면서 정월 대보름 이런 때는 애들이 다 나와요. 동네 애들이 무슨 다리를 건너야 된대요. 그래가지고 다리가 거기 있거든요. 저희 동네 애들이 다 거기로 와요. 근데 그 달도 정말 밝아요. 정말 불빛 하나 없는 그 속에서 좀만 놀아도 괜찮을 정도예요. 거기서 친한 친구들끼리 손잡고 우리 뭐 평생 어떻게 하는 거야 이렇게 같이 손잡고 다리 건너고.

  ─ 그러면 학교에 스위치는 없어도 낭만이 있고, 공부를 못해도 선생님들이 무시하지 않고. 그럼 사회주의가 좋은 거 아닌가요?

  그런데 발전이 없잖아요, 나라가. 학생들 입장에서는 너무 재밌고 좋은데, 학교 안 가도 별 그게 없는데. 귀찮고 뭐 ‘오늘은 학교 가기 싫다’, 뭐 이런 날 있잖아요. 그거 때문에 ‘아 오늘은 그냥 쉬어야지’ 이런 마음으로 안 가는 거지, 학교 가면 또 잘 노니 다 가거든요.
  저희도 학교 갈 때 도시락 싸갔거든요. 싸가고 그래서 막 수업 시간에 까먹기도 하고. 초등학교 때는 안 싸 간 것 같기도 하고. 아, 싸갔나? 아마 초등학교 때 제가 기억에 남는 게 반찬은 인조 고기 반찬, 두부 반찬, 감자 반찬, 가지 반찬 그런 거거든요. 교실 한가운데 난로, 불 지펴 가지고 하는 그거 있잖아요. 거기에 도시락을 막 올려놓고 먹고 그래가지고. 저희가 또 도시락 못 싸 온 애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저희가 밥이랑 해서 한 숟가락씩 주거든요. 그럼 걔 게 젤 많아지거든요. 그러면 애들 막 어쩔 때는 일부러 그렇게 먹을라고 도시락 안 싸고 오고. 근데 저는 안 싸 간 적은 없어서 모르겠는데 부모님이 여건이 안 돼서 못 싸 간 친구들도 있었겠죠. 그러면은 그 친구들 심정은 솔직히 안 겪어봐서 모르겠는데 저도 그렇게 다른 친구도 그렇고 그 친구가 달라고 했을 때 아까웠던 적은 없었을 거예요. 애들 막 많이 다 퍼서 주고. 근데 중간에 내가 먹고 싶은 반찬이 있으면 그걸 쏙 빼고 내 걸 더 많이 주고 이렇겐 했어도. 이거 맛있겠다 싶으면 몰래 내 반찬 속에 넣어두고 내 걸 더 많이 주고. 그렇게 애들 다 돌리고 나면 그 친구 게 정말 많아져요. 그렇게 막 먹고 했어가지고 도시락을 싸갖고 다닌 건 맞거든요.
  근데 그게 아마 중학교 때만 그런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끝나고 다 집에 갔던 것 같기도 하고. 거기선 반찬보다 그런 거 싸가면 인기 많았어요. 저희가 계란밥이라고 해서, 밥을 주먹 쥐어놓은 다음에 녹말가루 전분을 입혀서 그거를 기름에 튀겨요. 진짜 맛있어요. 저희 엄마가 자주 해줬었는데, 도시락에 이런 거에다가 흐트러지지 않게, 이렇게 해서 먹으면 엄청 맛있거든요. 그거랑 계란말이 이런 거 해가면 인기 많았었죠. 녹말가루, 전분, 많이 묻히진 말고, 그냥 밥이 모아질 수 있게끔 입힌 다음에 계란을 입혀서 튀기면은 맛있어요. 밥은 그냥 밥 하면은 맛있어요. 밥에다가 그 식초나 소금 좀 쳐가지고 하면 엄청 맛있어요.

  ─ 그러면 공부 스트레스는 없었나요? 다른 스트레스는요?

  없어요. 진짜 이게 있었는데, 저희 엄마(북한에서 연구원이셨다고 한다)는 과외를 대부분 학교선생님들한테 맡겼어요. 그니까 대학교 사람들이 하기도 하는데, 학교에서 담임선생님들이 집에 와서 하는 게 아니라, 제가 담임선생님 집에 갔었어요.
  거기는 학원이 없어요. 학원 개념이 아니고 그 집에서 그 사람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에 가는 거예요. 저는 영어 배웠었는데 진짜 했었거든요. 그냥 엄마가 가라고 하니까 그냥 대충 가는 거였는데. 별로 하기 싫었고 저는 담임선생님이랑, 엄마랑 같은 직장 다니는 사람 아들이었던 그 오빠한테 배웠죠. 이렇게 두 사람한테 저는 배웠었거든요. 근데 담임선생님한테 배우는 거는 그냥 엄마 아는 동생이고, 안 가면 혼나니까 갔던 거였고, 오빠한테 가는 거는 가면 그 오빠도 있고 또 다른 오빠도 한 명 있었거든요. 그럼 그 집에 가서 노는 게 재밌어서 가는 거였어요. 공부가 목적이었지만 저는 그냥 놀러 가는 거였거든요. 공부 스트레스는 진짜 없었던 것 같아요. 여기 애들은 막 공부에 쪄들어 있고 그런 거잖아요. 저는 또 이 사회에서는 그렇게 살아야 되니까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한국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노력이 있었던 거니까. 저는 거기도(북한) 너무 좋은 추억이지만 저는 이런 한국 문화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발전을 하니까.
  일단은 내가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산 게 뭐 나라에 대한 정책 이런 거를 다 떠나서 저는 그냥 여기에서 살았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너무 재밌고 행복했던 추억이라서, 저는 가끔 뭐 나도 여기서 태어났으면 정말 좋았겠다 이런 생각 많이 하는데. 또 생각하면은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으니까 나는 아마 그 추억을 갖기 위해 북한에서 태어났나보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또 여기서는 제가 숨기고 있잖아요. 또 ‘이걸 진짜 왜 샀지? 짜증나.’ 이런 생각이 드는데 또 생각해보니까 ‘아 후회하지 말자. 내가 샀고 그래서 앞으로 이런 스타일의 옷은 나한테 안 어울리는 옷이고 그냥 앞으로 사지 말자.’ 이런 식으로 넘기니까 이게 또 경험이 되고. 내가 앞으로 그런 옷을 안 선택하면 되고 내가 앞으로 주식을 남들이 한다고 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안 하면 되고 그런 거예요. 그래도 후회할 짓은 할 수 있어요. 내가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것을 알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후회할 짓은 할 수 있어도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너무 후회하고 자책하지 말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게 가장 큰 것 같아요.

  ─ 10년이나 20년 뒤에 뭐하고 있을 것 같아요? 누구랑 어떤 장소에서?

  일단 저는 엄청난 커리어를 갖고 있을 것 같고, 제가 아직 고민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다’라는 거는 잘 모르겠는데, 뭐가 됐든 그 위치에서 저는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뭔지는 모르겠지만은 남편도 있고, 애도 있고. 저는 제가 상상이 안 돼서 그러는데 20년 뒤에도 약간 똑같은 모습일 것 같거든요. 그래가지고 20년 뒤에도 저는 옷 입는 거 좋아하니까, 그때도 저는 예쁜 옷 입고 차도 좋은 차 타고, 그리고 큰 집에 대한 로망이 크거든요. 그때는 자식도 있고 하니까 한 40평? 40평만 해도 좋죠. 그리고 저는 그런 것도 있어요. 가장 하고 싶은 게 아빠 차 사주는 거 정말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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